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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대출금리 인하요구권 확대 시늉만

중앙일보 2014.09.10 00:36 종합 13면 지면보기
직장인 정모(32)씨는 지난해 11월 결혼을 앞두고 월급통장 거래은행에서 신용대출로 2500만원을 빌렸다. 전년도(2012년) 연 소득이 4100만원이란 증빙서류를 내자 금리는 6.47%로 책정됐다. 정씨는 올 1월 승진하자마자 은행에 ‘금리인하요구권’을 신청했다. “월급이 올랐으니 금리를 내려달라”며 새 급여명세서 등을 제출했다. 이씨의 연봉이 5200만원으로 오른 것을 확인한 은행은 금리를 5.83%로 낮춰줬다. 그 덕에 정씨는 연 16만원가량 이자를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제한 규정 안 풀고 홍보 뒷전
제도 아는 대출자 39%도 안 돼
은행 "현실 외면한 정책" 항변
인하 요구 수용률은 94%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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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리인하요구권이 도입된 건 2002년 8월이었다. 현행법상 은행·보험·카드사에서 돈을 빌린 소비자는 누구나 금융회사에 “금리를 내려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있다. 정씨처럼 직장에서 승진해 연봉이 올랐거나, 취업·이직·전문자격증 취득 등으로 신분이 바뀐 경우가 해당된다. 은행 한 곳을 꾸준히 이용해 우수고객이 됐거나 착실히 빚을 갚아 부채가 감소해도 이자를 낮춰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씨처럼 이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금융소비자는 아직도 많지 않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3월 대출 이용자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금리인하요구권이 있는 걸 안다고 답한 응답자는 38.5%에 불과했다. 대출금리 인하가 달갑지 않은 은행권의 소극적인 대응과 소비자의 무관심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용 실적이 부진하자 정부도 2012년 처음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은행들이 관련 규정을 만들고 소비자에게도 제도를 적극적으로 알리도록 했다. 2년 뒤인 지난 7월에도 정부는 ‘금융규제 개혁방안’을 발표하면서 금리인하요구권을 확대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금융위는 ‘금융규제 개혁방안’ 홈페이지(www.fvision.or.kr/20140710)에 “합리적 사유가 있는데도 은행 내규를 통해 6개월 이내엔 금리인하를 다시 요청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사례를 개선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본지가 시중은행 9곳의 내규를 조사해본 결과 이 같은 정부 대책은 ‘공염불’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은행 대부분이 내규를 통해 ▶대출기한 내 2회 제한 ▶6개월 내 동일 사유 요청 금지 ▶대출 신규·연장 3개월 이후 신청 등의 각종 금리인하요구권 제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표 참조>



 은행권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정부가 상품구조나 금리 산정방식 등 시장 현실을 외면한 채 보여주기식 정책 발표에만 급급하다는 항변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5월 “신용대출뿐 아니라 주택담보대출에도 금리인하요구권 적용을 추진하겠다”며 시중은행에 공문을 전달했다. 당시 지방은행 몇 곳을 제외하고는 우리은행과 국민은행이 주택담보대출에 금리인하요구권을 받지 않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부동산의 질적 차이에 따라 금리를 매긴다. 대출자의 신용등급과 무관하게 금리가 고정되는 상품이 95% 이상이라 요구권 적용이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7월 LTV·DTI를 완화한 이후 고정금리 상품에서 변동금리로 갈아타는 편이 금리인하를 요구하는 것보다 더 이득인 경우도 많다.



 정부와 은행권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피해는 소비자 몫이 되고 있다. 10년 전부터 대출 만기 때마다 은행에 요구해 금리를 낮춰왔다는 직장인 이모(39)씨는 “창구에서 목소리를 높인 고객만 권리를 찾고, 대부분은 금리 ‘호갱님’이 된 게 아니냐”며 반문했다. 금융연구원 손상호 선임연구위원은 “개인고객들은 기업고객과 달리 은행들이 일일이 실태를 파악하지 않는다. 처음 대출받을 때만 은행을 찾지 말고 소비자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자기 권익을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금감원이 발표한 은행들의 금리인하요구권 수용률은 94.3%에 달했다.



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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