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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명량과 노량 너머

중앙일보 2014.09.10 00:32 종합 22면 지면보기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어쩌다 보니 지난해 휴가 길이 명량에서 노량으로 이어졌다. 명량은 말 그대로 울돌목이었다. ‘울 명(鳴)’자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해남 쪽 전라우수영 기념관에서 내려다보니 알 수 있었다. 계곡물처럼 바닷물이 흐르는 해협. 그 위에 배를 띄우면 물소리가 사방을 에워쌀 듯했다. 하동과 남해를 나누는 노량도 비슷했다. 턱없이 부족한 전력으로 적과 맞설 수 있는 좁은 물길. 불가능이 가능으로, 패전이 승전으로 바뀐 역사적인 장소다.



 그런데 영 쓸쓸했다. 명량에도 노량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여름 한창 휴가철인데도 드넓은 주차장이 속절없이 비어 있었다. 사람들의 무관심을 탓해야 할지, 이순신 마케팅에 기댄 지방자치단체의 과잉투자를 탓해야 할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고 한다. 영화 ‘명량’의 인기에 힘입어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줄을 잇는다고 들었다. 난세를 헤쳐나가는 리더십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라고 언론은 해석한다.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역사가 현재로 되살아나며 지금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하지만 기왕 먼 길을 떠났다면 한 발짝 더 내디뎌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뒷받침한 숱한 백성의 생명력을 느껴보라고 말이다. 그 현장이 명량과 노량에서 그리 멀지 않다. 남해군 다랭이마을과 완도군 청산도의 구들장논이다.



 다랭이논(다랑논)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배 한 척 없는 섬마을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가꾼 논이다. 남해 설흘산이 바다로 내리지르는 45도 경사의 비탈에 석축을 쌓아 108층이 넘는 계단식 논을 일궜다. 굳이 전망대에 오르지 않아도 순환도로에서 위아래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조상들의 억척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구들장논도 척박한 땅을 일구는 다랑논의 한 갈래다. 온돌방을 만들 듯 구들장을 깔고 진흙으로 틈을 메운 뒤 흙을 얹어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 물이 부족한 섬의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임진왜란 전후 청산도에 정착한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뒤 한국 및 세계 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들 마을은 세월 따라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다. 피치 못할 고령화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이 늘었다. 큰 맘 먹고 찾아온 관광객은 비어 있는 논에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대로 두면 찾는 사람이 줄고 버려지는 땅이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순신은 부활할지 몰라도 민초들의 생명력은 잊혀질지 모른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고자 마을사람들도 노력하고 있다. ‘다랭이 한마음 나누기 회원’과 ‘구들장논 오너’ 모집이다. 1년에 몇 만원을 내면, 쌀이며 마늘 같은 친환경 농산물을 집으로 보내준다.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조금은 비싸겠지만 전통을 보존하는 데 일조한다는 보람으로 충분히 벌충할 수 있다. 인터넷에 한번 ‘다랭이마을’과 ‘구들장논’을 쳐보시길 바란다. 명량과 노량의 기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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