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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너희가 가난과 전쟁을 아느냐

중앙일보 2014.09.10 00:27 종합 23면 지면보기
김 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누가 10년을 매달렸다면, 그 소설은 목숨과도 같을 것이다. 작가 최명희는 10여 년간 『혼불』을 썼다. 난소암과 싸우며 10권까지 쓰다가 죽었다. 겨우 51세···작품이 인생이었던 셈이다. 소설은 간난(艱難)의 시대를 살아간 여자·서민들의 이야기다.



 74세 소설가 고정일이 최근 『불굴혼 박정희』를 출간했다. 박정희의 인생과 시대가 엮어진 10권짜리 실록 대하소설이다. 원고지 1만8000장을 그는 연필로 썼다. 일기처럼 10년을 썼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고정일에겐 추억의 대못 3개가 있다. 가난과 전쟁, 그리고 자살이다. 어린 시절 가족은 처절하게 못살았다. 서울 돌산에 있는 방공호 토굴에서 다섯 식구가 원시인처럼 살았다. 아버지가 벌이가 없어 어머니가 새벽마다 동냥을 다녔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린 정일이 대신 나섰다. 추운 겨울날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면 식모가 화를 냈다. 그러면서도 달달 떠는 아이에게 밥과 김치를 주었다. 하얀 쌀밥에서 김이 피어 오르면 고정일은 지금도 목이 메인다고 한다.



 정일이 11살이던 1951년 1월 북한 인민군을 피해 가족은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군대에 나가고 어머니와 3형제였다. 경기도 신갈 근처에서 인민군에게 막혔다. 빈 초가집에서 묵는데 어느 날 밤 미군 ‘쌕쌕이’가 폭격했다. 지붕이 무너지면서 정일이 가족을 덮쳤다. 여덟 살 동생은 마당으로 튕겨 나갔고 어머니는 대들보에 깔렸으며 두 살짜리는 어머니 팔 속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정일은 외할머니 집으로 피했다가 아버지와 함께 초가집에 다시 갔다. 아버지는 세 가족의 뼈를 마대에 주워 담았다.



 어린 정일을 버텨준 건 작은 동화책이었다. 폭격을 맞은 집에서 주운 방정환의 『사랑의 선물』이다. 책에는 ‘엄마 찾아 3만리’ 같은 꿈과 희망의 얘기가 가득했다. 미군부대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면서도 정일은 꿈을 잃지 않았다.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그런 책을 쓰고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일은 꿈을 향해 달렸다. 12살엔 책방에서 일했고 15살엔 청계천 다리 위에 좌판을 놓았다. 16살엔 천막 책방으로 키웠고 그해 겨울 드디어 출판사를 차렸다. 처음 수년은 거침이 없었다. 만드는 책마다 잘 팔렸다. 그러나 시련이 지뢰처럼 숨어 있었다.



 20살 청년 사장은 30권짜리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을 출판했다. 책보다 밥이 급한 시절에 이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는 쫄딱 망했고 빚더미에 깔렸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리다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약국을 돌면서 수면제를 모아 동대문야구장 옆 77여관으로 들어갔다.



 알약들을 주먹에 움켜쥐고 입에 털어 넣으려는데 누가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고 한다. 깜짝 놀라 문을 여니 여관주인이었다. 주인은 정일에게서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는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한국전쟁 때 함경도에서 자식들을 데리고 넘어왔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호통을 쳤다. “왜 여관 이름이 77인지 알간? 식모살이, 떡장수, 식당 허드렛일 안 해본 게 없다. 77번 도전해서 세운 게 바로 이 여관이란 말이다. 그런데 젊은 놈이 좀 힘들다고 약을 먹어? 이런 못난 놈.”



 가난·전쟁·자살을 넘어 고정일은 출판계 거목으로 우뚝 섰다. 동서문화사가 출판한 5000여 종은 한국인에게 지식과 교양, 그리고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도 고정일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유언처럼 내놓은 게 박정희 대하소설이다.



 “가난·전쟁·자살을 겪으면서 나는 밑바닥을 살았습니다. 그 세상은 헐벗고 처절하고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달라졌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더니 건장한 국가로 성장했지요. 덩달아 내 출판인생도 커져 갔습니다. 50줄에 들어 나는 성장의 비밀을 찾아 나섰습니다. 결론은 박정희였습니다.”



박정희를 발견한 건 그에게 대단한 반전(反轉)이다. “1970년대 나는 지독한 박정희 반대자였습니다. ‘독재’만을 본 거지요. 세월이 지나니 다른 게 보이더군요. 박정희에게 독재는 그저 수단이었어요. 무서운 통치력으로 나라를 잘살게 하려는 애국 독재였지요. 민주화를 외치던 후임 대통령과 비교하면서 나는 더욱 확신을 가졌습니다.” 권(券)마다 고정일은 앨빈 토플러 같은 세계적인 학자의 박정희 평가를 붙여놓았다. 자신의 생각이 세계의 생각이라는 걸 보이려 한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정일처럼 박정희와 부닥치지 않고는 대한민국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딸에게 박정희 책은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조갑제가 쓴 박정희 전기(13권), 안병훈이 엮은 박정희 사진집도 있다. 올가을 젊은이들에게 혁명가를 만나도록 해주면 어떨까.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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