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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위로] 교황과 동행한 4박 5일간의 기록…땡큐, 프란치스코

온라인 중앙일보 2014.09.09 00:08


































여성중앙교황의 방문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작은 차를 타고, 작은 집에서 자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대한민국은 위로받았다.



지난 8월 14일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일정 내내 대한민국은 교황에게 빠져들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감동했고, 소탈하게 웃는 모습에 모처럼 시름을 잊었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교황앓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세월호 사고, 군 병사 구타 사망 사건, 끝이 보이지 않는 정쟁과 같은 악재가 끊이지 않던 대한민국의 현실에 좌절했던 국민이 교황의 미소와 손길에 위로받는 모습이다. 인터넷에서는 교황의 자애로움에 빠져들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는 교황 관련 카페가 20개 넘게 생겨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용기가 아닌 전세기를 타고 방한한 사실을 빗대서 이름을 단 ‘교황에게 에어포스원은 없다’ 등의 카페가 대표적이다.



서점가에선 교황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끌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7월 238권 팔렸던 교황 관련 서적들이 지난달에는 2858권이 팔리는 등 10배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위로와 가르침을 담은『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등이 주목받았다.



서울 명동성당 성물방(聖物房)에는 교황 기념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교황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티셔츠는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교황을 가까이서 모신다는 생각으로 티셔츠를 구입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교황을 본뜬 미니어처 석고상이나 미사보, 손수건도 물건을 가져다 놓자마자 동날 정도로 팔렸다. 교황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와 책갈피, 십자가도 많이 찾는 성물이었다.



할아버지 리더십으로 벽 허문 교황



방한 기간 내내 보여준 소탈함과 스스럼없는 모습도 한국인들에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대표적인 게 배기량 1600cc인 준중형차 쏘울을 ‘포프모빌’(교황의 의전 차량)로 활용한 것이다. 교황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고속철을 타보았다는 말에도 국민은 미소 지었다.



방한 이튿날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대전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던 교황은 기상 사정 등으로 인해 계획을 바꿔 헬기 대신 KTX를 이용했다. 교황청 대변인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께서는 (모국인)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에서 한 번도 고속철을 타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 고속철을 타고 대전을 가 기뻐하셨다”라고 말했다.



사흘째 되던 날, 서울역은 이른 새벽부터 시복식 미사 참석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가톨릭 신자들로 붐볐다. 교구별로 특별 열차나 관광버스를 전세 낸 곳도 있었다. 광주광역시의 광주대교구는 무궁화호 특별 열차 10량을 전세 내 신자들의 편의를 돌봤다. 광주대교구에선 9개 성당 850명의 신자가 이번 시복식 미사에 초대됐다. 천주교 교황방한준비위원회는 서울역 등을 이용해 상경한 신자를 돕기 위해 각 기차역과 광화문 광장을 오가는 관광버스 수백 대를 배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려고 모인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90만 명에 달했다. 교황은 이날 서울 서소문 순교 성지 참배를 마치고 광화문에서 2시간 가까이 시복식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직전 사방이 뚫린 차량을 타고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며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울고 웃으며 교황을 맞았다.



서소문 순교성지와 124위 시복 미사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세월호 침몰과 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으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교황의 미소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온 조계숙씨는 “약한 사람을 다독여주시는 모습에서 깊이 감명받았다”라고 했다. 교황은 최대한 많은 사람과 만나 그들의 손에 입을 맞췄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셀카’ 촬영에도 응해줬다. 누군가 어린아이를 들어 올리면, 그 말랑말랑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서 교황은 광화문 광장을 한 바퀴 돌아 세월호 피해자 가족 400명 앞에 다다르자 차에서 내렸다. 34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영오씨의 손을 맞잡았다. 김영오씨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그는 교황의 손에 입을 맞췄다. 이어 “더 이상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세월호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교황에게 부탁했다. 교황은 손을 놓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뒤 김영오씨가 건넨 노란 종이의 편지를 받아 우측 주머니에 넣었다. 김영오씨는 교황의 옷깃에 꽂힌, 세월호 희생자 추모의 뜻이 담긴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가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세워줬다. 교황의 시선 너머로 ‘We want the truth’(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철저한 진상 규명’ 등의 문구가 적힌노란 수건들이 겹겹이 펼쳐졌다. 차에 오른 교황은 잠시 침묵했다.



다시 30여 분의 퍼레이드를 마치고 시복 미사 집전을 위해 붉은색 제의로 갈아입은 교황이 단상에 올랐다. 붉은색 제의는 순교와 피, 성령을 상징한다. 이날 시복식을 통해 복자(福子)·복녀(福女)로 추대된 124위는 대부분 평신도다. 교황이 직접 순교자의 땅을 찾아가 시복식을 집전하는 경우는 전례가 드문 일이다. 교황이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확산된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기리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시복 강론에서 교황은 “순교자들이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과 순교자들의 연대 의식”을 언급하며 “순교자들의 유산은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영감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와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셀카’ 촬영도 자연스럽네



교황은 충북 음성 꽃동네도 찾아갔다. 그는 몸이 불편한 이들을 일일이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80명 가까이 됐지만 한 명 한 명을 살폈다. 한 어린이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 어린이의 입에 넣어 보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는 꽉 끌어안아 자신을 만지도록 하고,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는 양 볼을 감싸주기도 했다. 얼굴을 들이밀면 볼을 맞댔다.



한편 이날 저녁 꽃동네에선 태양이 마구 도는 듯한 기현상을 봤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오후 6시 10분부터 서쪽 하늘의 태양이 마치 좌우로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가던 신자들은 “태양 테두리의 빛이 20분가량 회전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밝아진 뒤 보랏빛을 띠며 좌우로 돌았다”라며 “교황 방문을 하느님이 축복하고 있다. 기적이다”라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고 한다. 기상청 관계자는 “태양 테두리가 도는 현상은 기록된 적이 없고 이런 문의도 처음”이라고 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보는 이들이 그의 손이 부르틀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검게 코팅된 창문을 내리고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건네기도 했다. 눈을 맞추려고 까치발을 든 이들에게는 눈인사로 화답했다. “그의 파격(破格)은 더 이상 파격이 아니다”라는 평을 듣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도 상대방이 ‘황송함’을 느낄 만큼 몸을 낮추며 친근하게 다가섰다.



교황은 자신을 ‘거리의 사제’라고 부른다. 취임 이후 처음 브라질을 방문했다가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카예헤로’(Callejero)라고 부른다”라고 말했다. 카예헤로는 ‘거리의’ 또는 ‘걷기를 좋아하는’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즐긴다는 의미다. 지난 6월에는 로마의 거리로 나온 한 환자에게 다가가 얼굴에 입을 맞췄다.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의 군중 속에 있던 환자를 껴안은 적도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났다. 도중에 여러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교황은 연신 손을 흔들었다. 건물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시간 기다린 가톨릭 신자들과 일반인들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넸다. 그가 탄 차는 도보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교황은 기다리던 지체 장애인의 손을 잡아줬다.



교황은 늘 ‘셀카’ 촬영에도 흔쾌히 응했다. 청년들과의 만남에서, 서소문 성지 방문에서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가오는 이들을 피하지 않았다. 유흥식 천주교 대전교구장은 “교황과의 셀카 촬영이 특이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였다”라고 말했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과거 남아메리카, 리우데자네이루, 이탈리아 로마 등에서 교황이 행한 일들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것이 어느 곳에서나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교황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교황의 모습은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됐다. 지난 5월의 중동 방문 때 교황은 갑작스럽게 차를 세웠다. 베들레헴에서 공개 미사가 치러지는 구유 광장으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리 장벽 앞에서 교황은 차에서 내려 5분 동안 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즉석에서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을 교황청으로 초청했다. 양측은 교황의 초대를 받아들여 다음 달인 6월 바티칸에서 만나 포옹하고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를 함께 심었다.



교황의 이번 방한은 천주교 신도를 늘리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던 1989년에도 비슷한 효과를 경험했던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전에도 천주교 신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사를 부정하지 않는 등 배타성이 덜한 데다 성당이 주는 특유의 포근한 느낌이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갖게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기간 동안 9개의 한국어 트윗을 남겨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4박 5일의 방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트위터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한국의 친구들이여,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저는 곧 아시아에 다시 올 것입니다”라고.



인간 프란치스코와 그의 가족



교황의 아버지 마리오 호세 베르골리오는 1929년 독재자 무솔리니가 싫어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다고 한다. 교황의 형제자매 5남매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여동생 마리아 엘레나 베르골리오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장남이다. 교황의 어머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이다. 이주 노동자의 아들인 교황은 즉위 이후에도 이주 노동자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올 초엔 ‘불법 체류 혐의로 아빠가 감옥에 가 있다’는 멕시코 출신 열 살 여자아이의 편지를 받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청원해 그의 석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교황은 초등학교 시절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 다니는 살레시오(돈 보스코) 학교를 다녔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살레시오고와 같은 재단이다. 요즘엔 세계 각국에 명문대 진학 준비를 위한 살레시오 계열 학교도 많다. 하지만 살레시오회는 본디 19세기 산업 혁명 당시 취업 전선으로 내몰렸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교황 아버지의 고향인 피에몬테 지방의 토리노에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



교황은 공고(工高) 출신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27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화학을 전공한 교황은 졸업 후 흥미롭게도 한 연구소의 식당에 들어가 요리 일을 거들었다. 그래서인지 교황의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교황은 술집 문지기, 환경미화원 등을 전전했다.



골초였던 교황은 21세 때 급성 폐렴을 앓았고, 폐에서 낭종이 발견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당시 오른쪽 폐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 지금도 후유증이 있다고 한다.



1955년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소(小)신학교(대학교 예과 격)에 입학한다. 교황의 어머니는 교황이 신학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교황이 사제품을 받은 1969년까지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제품을 받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로부터 강복(降福)을 받았다.



한편 교황은 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삼촌의 결혼식에 갔다가 미모의 여성을 만난 뒤 짝사랑에 빠져 신부가 되는 길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제 서품 후 스페인·아일랜드·독일 등지에서 활동한 교황은 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 그리고 우크라이나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우크라이나어는 살레시오 학교 재학 당시 교황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신부에게 배웠다고 한다. 교황은 사석에서 “외국어 중 영어가 가장 어렵다”라며 ‘영어 울렁증’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획=조영재 기자, 취재=박성우, 이수기, 유재연(중앙SUNDAY 기자), 사진=중앙포토



[사진설명]



1 교황은 방한 기간 동안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았으며 어린아이들에게는 꼭 입맞춤을 해주었다.



2 지난해 로마 교외에 있는 한 소년원을 찾은 교황은 재소자 12명의 발을 씻겨주고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3 교황의 어린 시절 모습.



4 방한을 마무리하고 떠나며, 한국 주교단이 마련한 방명록에 교황이 남긴 서명.



5 그는 새 교황이 된 지난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가난한 교회를 만들겠다”고 밝혔었다.



6 교황이 평소 신고 다니는 구두. 낡은 캐주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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