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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설 도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중앙일보 2014.09.07 17:20
장쩌민(江澤民·88) 전 중국 국가주석의 사망설은 중추절(中秋節·8일) 연휴를 앞두고 갑자기 터져나왔다.



앞서 2011년 7월에도 장 전 주석의 사망설이 돌았다.그 해 7월 6일 해외에 서버를 둔 중국어 사이트 보쉰(博訊)닷컴이 “장 전 주석이 5일 밤에 베이징 301의원(해방군총의원)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당일 번복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보쉰은 “장 전 주석이 간암으로 심장 기능을 상실했으나 뇌세포는 여전히 살아 있다”며 “입원 장소도 베이징이 아니라 상하이의 화둥(華東)의원”이라고 정정했다.



당시 보쉰은 당일 오후에는 “오늘 낮 12시 무렵 베이징의 한 유명 인사가 전화를 걸어와 사망 소식을 부인했으며 장 전 주석의 건강이 좋다고 알려 왔다”고 해명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올해 미수(米壽·88세)인 장 전 주석은 파킨슨병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은 장 전 주석을 1989년 6·4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운동 당시 당 총서기로 전격 발탁했던 전임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이 앓았던 병이기도 하다. 항간에는 장 전 주석이 암을 앓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2011년 당시 중국의 한 정보 소식통은 “장 전 주석이 파킨슨병과 심혈관 계통의 질환을 앓아왔다”고 전하면서 “기초 체력이 저하되고 각종 장기가 쇠약해져 건강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당장 생명이 위독한 단계는 아니다”고 전했었다.



그 이후 3년만에 장 주석의 사망설이 다시 불거진 것이다. 장 전 주석의 건강에 대해서는 “고령으로 인해 심장과 뇌를 비롯해 심혈관 계통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장 전 주석의 소재지에 대해 그동안 고향인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 또는 거기서 멀지 않고 기후 조건이 잘 맞는 상하이(上海)에서 요양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징에는 아주 가끔 다녀가는 정도 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시진핑(習近平·61)국가주석이 이달 중순으로 예정했던 파키스탄 방문을 갑자기 연기한 것으로 확인돼 장 전 주석의 사망설 또는 위독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친강(秦剛)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6일 시 주석의 파키스탄 방문 연기 소식을 공식 확인했다. 그러나 장 전 주석의 사망 소문과의 연관성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장 전 주석이 실제로 숨졌다면 앞으로 중국 정계에 적잖은 파장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장 전 주석은 중국 정치권 최대 계파인 상하이방(上海幇)의 좌장 역할을 해왔다. 2003년 국가주석 자리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 물려줬고 2005년에는 군사위 주석에서도 물러났다. 후 주석이 다시 2013년 시진핑 현 주석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장 전 주석은 실권은 없다지만 정계에서 상징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시 주석이 주도해온 반 부패 드라이브에 장 전 주석의 장남 장몐헝(62)이 걸려들었다는 관측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다. 이 와중에 장 전 주석이 시 주석의 부패 척결에 속도 조절을 요구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따라서 장 전 주석이 숨졌다면 시 주석의 사정 드라이브에 탄력이 붙을 수 도 있을 전망이다.



◇자동차 전문 '테크노 크라트' 출신=1926년 8월 17일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지하 공산당 운도을 하다 46년 입당했다. 47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에 전기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상하이의 이민(益民) 식품회사에서 엔지니어로, 55년 당시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실습했다. 귀국한 뒤 창춘(長春) 이치(一汽)자동차 공장에서 활약했다.여기서 성과를 인정받아 중앙으로 발탁돼 전자공업부장(장관)을 지냈다.85년 상하이 시장에 이어 시 당서기로 선출됐다. 82년 당 중앙위원에, 87년 11월에는 정치국원으로 뽑혔다.



◇6·4 당시 총서기로 발탁돼=89년 이른바 6·4 천안문 사태는 중국의 비극이었지만 장에게는 정치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당시 개혁파로 분류되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서거를 계기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터졌다. 이 때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는 시위대에 온건한 입장을 보이다 덩샤오핑과 리펑(李鵬)등 강경파에 밀려 숙청됐다.

이 때 덩을 비롯한 보수파 원로들이 상하이 당서기로 있던 장을 총서기로 발탁했다.하루 앞침에 중앙무대로 올라온 장은 6·4사태의 혼란상을 수습했다. 93년에는 국가주석 자리에 올라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됐다. 97년 덩이 사망하면서 당·정·군 3개 권력이 모두 장에게 급속히 쏠렸다.



◇중공 제 3세대 지도자 자리매김=89년부터 13년 간 중국을 통치해온 장은 1세대 마오쩌둥(毛澤東),2세대 덩샤오핑에 이은 중공 3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6·4이후 혼란기를 안정시키면서 개혁·개방에 매진했다. 특히 자본가의 중공 입당을 허용한 '3개 대표이론'을 주창했다.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중국 경제를 도약시켰다. 이를 통해 중국은 장이 2003년 3월 후 주석에게 권좌를 물려줄 때 까지 안정적인 고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그가 총서기로 있던 92년 8월24일 한국과는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그는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95년 한국을 방문했고 한·중 관계는 오늘날과 같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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