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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의 시대공감] 대우 해체와 명량대첩

중앙선데이 2014.09.06 00:05 391호 31면 지면보기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우 해체를 둘러싼 논란은 처음부터 방향이 많이 잘못된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대우 해체의 진실 규명에서 핵심은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철학과 방법론을 둘러싼 충돌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DJ)은 김우중 회장에게 “경제대통령을 해달라”며 김 회장을 경제정책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처방을 그대로 집행하는 것이 한국경제에 좋은 일인지 의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DJ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3인의 유력 후보 중 유일하게 ‘IMF 재협상’ 얘기를 꺼낸 인물이었다. 재협상 발언이 나오자 마자 미셸 캉드시 당시 IMF 총재가 한국에 날아와서 세 후보에게 각서를 받아갔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약속한 IMF 프로그램을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대로 집행하겠다는 것이었다. DJ는 각서에 사인을 하고 당선됐지만, IMF 처방에 대한 의문을 버리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김우중 회장은 IMF 프로그램을 철저히 이행하자는 ‘구조조정론자’들의 반대편 얘기를 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다. 김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계를 대표하고 있었고, 외환위기가 빈발한 신흥시장 중심으로 ‘세계경영’을 펼쳐 위기가 왜 일어나고, 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피부로 알고 있었다.

김 회장은 IMF 프로그램을 ‘외침(外侵)’으로 규정했다. 1998년5월에 한 공개강연에서 김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IMF체제가 …형식상으로는 국제 금융기관들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리체제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체제가 오래가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김 회장은 경제관료들과 달리 ‘매년 500억달러 무역흑자 달성을 통한 2년 내 IMF체제 조기탈출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최근 한 서평은 이렇게 행동한 김 회장을 명량대첩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신들뿐 아니라 국내 언론·학계·선진국들은 한 목소리로 외환위기가 한국이 크게 잘못해서 온 것이라며 ‘철저한 구조조정’을 외쳤다. 기업부채비율 200% 낮추기 등으로 국내 자산을 외국 투자자들에게 값싸게 팔더라도 그것을 통해 ‘투자자 신뢰’를 회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자산 해외매각이 애국하는 일이었고 수출을 늘리는 것은 위기를 심화시키는 역적짓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김 회장이 ‘세상 바뀐 것을 모른다’고도 했고, DJ가 김 회장을 잘못 신뢰하고 있다고 계속 ‘진언’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는 해체됐다. 김 회장은 해외로 떠밀려나갔다.

그 후 새로이 만들어진 한국경제의 ‘정사(正史)’는 한국이 구조조정을 ‘잘 해서’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했다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1998년만 보더라도 이 ‘정사’엔 문제가 많았다. 그 해 한국의 무역흑자는 416억 달러이고 대우가 기록한 무역흑자는 그 3분의 1에 달하는 143억 달러였다. 외국인 직접투자액은 신고기준으로 89억달러였지만 집행기준으로는(UNCTAD 발표) 54억달러에 불과했다. 대우가 거둔 무역흑자의 3분의 1 수준이다. 김 회장의 ‘역적짓’이 조정의 ‘애국하는 일’보다 외환위기 극복에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산화(散花)했다”고 좌승희 전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말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돌아보면 ‘정사’의 허구성이 더 잘 드러난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에 IMF프로그램을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 고금리 대신 제로금리를 택했고 양적완화까지 시행했다. 한국에게는 ‘대마불사론’에 빠지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미국은 세계최대 자동차 회사(GM)·상업은행(시티)·보험회사(AIG) 등을 경영진조차 바꾸지 않고 돈을 무제한 공급해서 살려냈다. 이에 대해 선진국의 이중잣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일잣대다. 자신의 이익이라는 잣대로 보면 남들에게 IMF프로그램을 강요하면 이익볼 일이 많고, 자신들에게는 IMF프로그램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다. 15년 전 한국 조정의 대신들이 적(敵)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IMF체제의 부정적 유산은 한국사회에 길게 남아 있다. 기업부채 비율은 미국보다도 낮아졌지만 가계부채 1000조원 시대가 열렸다. 기업부채가 가계부채로 이전됐을 뿐이다. 그래서 내수가 부진하고 경제는 저성장으로 신음한다. 정리해고가 도입되면서 한국은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양극화도 많이 심해졌다. 이제 충분히 시간이 지난 만큼 사실(史實)을 객관적으로 따져보고 한국 현대경제사를 다시 써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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