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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그들만의 은어'

중앙일보 2014.09.06 01:23 종합 14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벙커(bunker·골프장 코스 중 모래가 들어 있는 우묵한 곳), 해저드(hazard·장애물)는 골프 용어지만 법조계에서는 은어(隱語)로 차용해 쓰인다. 배석 판사들은 직장에서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부장을 ‘벙커’라고 부른다. 일 중독 상사도 벙커에 포함된다. 사방이 벙커라는 뜻의 ‘사막’도 애용되는 용어다. 벙커보다 증상이 심한 경우 ‘해저드’라고 한다. 대신 부장판사들은 일을 못하는 배석들을 벙키(Bunkie)로 부른다. 벙커와 신인 ‘루키(Rookie)’의 합성어다.

몸배석으로 밥조에 못 끼고
깡치사건 맡아 엄지에 골무 껴
장날인 오늘도 골인하려나



 은어는 특정 집단에서만 은밀하게 통용되는 말을 뜻한다. 사전적 정의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이나 계급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특수어”다. 언어사회학자들은 특정 집단이 같은 운명에 놓여 있을 때 은어가 발달한다고 분석한다. 전문성이 강할수록 은어가 풍성해질 가능성이 높다. 산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심마니들,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없는 궁궐 나인들, 조직폭력배·유흥업소 등 그늘 세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은어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문성이 강하고 수사나 재판과 관련된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법조계도 은어가 발달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요즘엔 수사나 재판 관련 은어보다는 업무의 고충, 애환을 표현하는 은어 사용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법원 내부에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엿볼 수 있는 어휘가 적지 않다. 합의 재판부에서 재판장 양옆에 앉는 두 명의 배석 판사들을 각각 우(右)배석, 좌(左)배석으로 부른다. 역할이 아닌 위치를 보여주는 용어라는 게 포인트다. 재판장을 중심으로 한 좌우 배석의 질서는 법원 밖에서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법원 인근에선 이 삼각편대를 그대로 유지하며 이동하는 풍경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이를 두고 ‘학익진’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주심 판사가 재판장에게 판결문을 거의 완성해 보여주는 것을 ‘납품한다’고 말한다. 재판장이 판결문 작성 방향을 코치하면 주심 판사가 그에 따라 집필해 오는 과정이 물건 납품 과정과 비슷하다고 해서다. ‘3초’(3개월 초과 사건), ‘5초’(5개월 초과 사건) 등은 사건 처리와 관련해 판사들의 심리적 압박을 보여주는 은어다. 처리 지연 사건이 많으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외상판결’은 사건이 폭주해 선고 이유를 완벽하게 작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려지는 판결이다. 과거엔 비일비재했지만 판결문 전산 등록과 송달 시한 관련 규칙이 엄격해지면서 많이 사라졌다.



 판사들의 식사 그룹인 ‘밥조’, 밥조의 일정과 예산을 관리하는 판사를 뜻하는 ‘총무’, 다른 부 판사에게 일이 생겨 대신 재판에 들어가는 ‘몸배석’, 재판일을 뜻하는 ‘장날’도 법원의 일상을 보여준다.



‘깡치사건’은 법조계에서 두루 쓰이는 은어다. 사안이 복잡하고 품은 많이 드는데, 해결해도 빛은 나지 않는 몹쓸 특징이 있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수천 장에 달하는 서류를 넘기다 보면 손가락에 굳은살, 즉 ‘깡치’가 박힌다는 뜻이라는 설명이 많았다. 서울 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깡치사건을 할 때는 엄지에 끼는 고무 골무가 필수품”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귀찮은 깡치(앙금·찌꺼기)가 많아서라는 얘기도 있었다.



검찰 은어와 문화 중 ‘폭탄주’처럼 사회로 확산한 것이 많다. 전문가라는 뜻의 ‘~통’도 검찰에서 먼저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안통’(공안수사 전문가), ‘특수통’(특별수사), ‘기획통’(기획업무) 등이 대표적이다. 영어의 검사 ‘프로시큐터(Prosecutor)’의 준말인 ‘프로’도 검사들이 먼저 쓰기 시작했는데, 최근엔 변호사와 판사들도 쓰는 추세다. 공공장소에서 서로를 검사·판사·변호사라고 부르는 게 껄끄러울 때 사용한다. 판사와 변호사는 프로를 ‘전문가·선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다.



법정 드라마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호칭인 ‘김변’(김 변호사), ‘이판’(이 판사), ‘박검’(박 검사)의 사용 빈도는 오히려 낮다. 대한변호사협회 노영희 대변인은 “친한 사이에선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어린 변호사나 판사, 가령 파트너 변호사가 일반 변호사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된다.



수사 관련 은어로는 ‘일도이부삼빽’(범죄 적발 시 도망이 최선이고 차선은 부인, 마지막으로 ‘빽’이라는 뜻), ‘손 탄 사건’(수사 중 언론에 유출된 사건), ‘100번 강간 사건’(남편을 의식해 내연남을 성폭행범으로 고소한 사건), ‘사지(四知)사건’(하늘·땅·준 사람·받은 사람만 아는 사건, 즉 뇌물수수 사건), ‘골인·입고’(구속) 등이 있다.



 그릇된 법조 관행이 폭로되면서 널리 공개된 은어도 다수 있다. ‘관선변호사·현관예우’(판사가 다른 판사에게 청탁하는 행위), ‘포스트잇 선임계’(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가 제출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메모를 붙이는 것), ‘전화변론’(검찰 고위직 출신이 전화로 사건을 맡았다고 고지하는 행위) 등이 대표적이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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