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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연암과 달사람

중앙일보 2014.09.06 00:27 종합 24면 지면보기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밝고 큰 보름달을 보면 달과 관련해 곧잘 내 머리에 떠오르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내 머리를 자주 방문하는 보름날의 빈객은 두 사람이다. 한 분은 연암 박지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칼 세이건(『코스모스』의 저자)이다.



 연암이 떠오르는 것은 그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달사람’ 이야기 때문이다. ‘달에도 사람이 산다면’이라는 상상을 동원해 연암이 중국 지인들에게 이쪽(지구)과 저쪽(달)의 보름날 밤 풍경을 대비해 보이는 장면이다. 보름날 지구 사람들이 달을 쳐다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듯 달나라 사람들도 이쪽 지구를 바라보며 그들 나름의 상상을 해보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떡방아 찧는 토끼 이야기는 한국과 중국에 널리 퍼진 민담이다. 그러나 사람을 달에 투사해 보는 상상력은 동아시아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다. 연암의 이야기에는 지구를 ‘상대화’하는 근대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연경(燕京·베이징)을 오가며 서양의 선진 과학(천문학)계 소식들을 심심찮게 접했을 연암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애당초 발동시킬 수도 없었을 듯한 상상력이다.



 이 우주의 수많은 은하들에는 지구인들 같은 지적 생명체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 사람은 칼 세이건이다. 그의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된다. 그는 지적 생명체의 우주 내 존재 ‘가능성’을 말한 것이지 우주 어딘가에 그런 생명체들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공상소설가가 아닌 엄밀한 과학자로서의 발언 수위를 철저하게 지키려 했던 사람이다. 인간이 지금까지의 우주 탐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태양계 안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지구 문명의 사촌 비슷한 것이나마 찾아낼 가능성도 극히 희박하다고 말한 사람이 세이건이다.



달은 행성도 아닌 위성이다. 그 위성에 사람은커녕 토끼도, 계수나무도, 툰드라의 이끼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니까 현대 ‘과학자’에게 연암의 달사람 이야기는 오간 데 없이 비과학적이고 전과학적인 순수 공상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럴까?”--이건 지금쯤 추석 귀성길에 올라 있을 독자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묻고 싶은 말이다. 지금 같은 과학의 시대에 달나라 토끼니, 떡방아니 하는 ‘비과학적’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미신, 비진실, 거짓말을 아이들에게 퍼뜨리는 일과 다름없다고 그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분들에게는 신화는 물론 동화조차도 ‘미신’이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어른들이나 듣고 즐길 것이지, 엄마·아빠가 하는 말이면 다 믿는 꼬맹이들에게는 절대로 들려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 플라톤이 그의 『국가』에서 신화추방론을 폈을 때 써먹은 것과 잘도 들어맞는 주장이고 논리다.



 아이들에게는 달나라 토끼 이야기, 떡방아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조금 단수가 높긴 하지만 연암의 달사람 이야기도 이런저런 운을 달고 앞뒤 추임새를 넣어 귀성길의 얘깃거리로 삼을 만하다. 그런 이야기는 무슨 ‘지식’을 넣어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달나라에 토끼도, 사람도 없다는 것은 요즘 다섯 살짜리들도 다 아는 얘기다. 다 알면서도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이야기를 조르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세이건은 과학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진, 인간 고유의 활동이고 문화라고 말한 사람이다. 맞는 말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보름날 달나라 토끼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세이건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그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그도 어린 시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이야기의 넓고도 관대한 상상력이 그의 ‘과학’을 키워준 힘의 큰 줄기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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