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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인재·자본 끌어모은 '관용' 문화 17세기 대국 네덜란드 만들었다

중앙일보 2014.09.06 00:25 종합 20면 지면보기
관용의 역사

김응종 지음, 푸른역사

488쪽, 2만5000원




지난달 한국을 찾았던 프란체스코 교황은 용서와 관용, 협력으로 불의를 극복하라고 충고했다. 오늘날 용서·화해·협력이란 키워드는 기독교의 전매특허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남대 사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고개를 젓는다. 초기 기독교는 수난을 받으면서 종교에 대한 관용과 자유를 주장했지만, 4세기 로마제국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권력의 종교가 되자 오히려 다른 종교를 박해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유일신 외에 다른 믿음은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도그마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는 하나의 보편사회를 지향했을 뿐 다양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와 믿음이 다른 사람에 이교·이단의 굴레를 씌워 철저히 탄압했다. 기독교의 어두운 과거사다. 사랑의 종교로 출발했던 기독교가 가장 불관용적으로 변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종교개혁 이후엔 하느님을 믿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까지 벌였다.



 지은이는 근대 이후 기독교의 종교적 관용이 어떤 방식으로 싹트고 결국 서구 사회에 자리잡게 됐는지를 파고든다. 무엇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관용의 원동력으로 본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는 신의 뜻에 따르는 숙명론을 거부하고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열리면서 관용이란 말이 비로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16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원래 ‘용인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내가 남에게 베푸는 행동으로 시작한 관용은 세월이 흐르고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이해와 용서를 수반한다. 용서는 협력을 부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 간의 협력은 숱한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관용을 사유의 중심에 놓은 사상가가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1466~1536)다. 가톨릭 사제인 그는 유럽 여러 곳에서 공부하며 종교가 아닌 인간 중심의 사상에 눈을 떴다.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인문주의자로서 개방과 관용을 강조했다. 이교도는 물론 종교개혁도 용서하지 않던 시절에 ‘종교적 관용’을 대놓고 주장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는 다양성을 지향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해 ‘관용의 나라’로 불리게 됐다.



 관용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도의 차별을 금지한 낭트칙령(1598)이 프랑스에서 1685년 폐지되자 기술자와 상인이 대다수인 신교도 위그노가 대거 이 나라로 옮아갔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대인을 추방하자 이들은 재산을 들고 네덜란드로 몰려갔다. 관용은 인재와 자본을 끄는 자석 역할을 했다. 이 작은 나라가 해상제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관용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은 관용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관용의 눈으로 서양사를 살핀다. 갈등 속의 한국 사회에 대한 메시지는 덤이다. 관용은 종교뿐 아니라 갈등이 있는 모든 곳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S BOX] 태양신, 상형문자 … 이집트 문화 맥이 끊긴 까닭



이 책을 읽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교와 상형문자의 맥이 끊긴 이유가 새삼 떠올랐다. 장본인은 페르시아 대군도, 알렉산드로스 기병도, 로마 군단도 아니었다. 바로 고대 기독교도였다. 종교 활동과 함께 문자·학문을 가르치던 태양신 사원들이 기독교도와 로마 정부에 의해 폐쇄됐기 때문이다. 391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다.



 기독교도들에겐 기독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유일신을 따르는 그들에게 다른 신은 모두 거짓이었고 종교적 관용이란 배교나 다름없었다. 이교 신전을 파괴하고 신자를 박해하는 건 믿음의 실천으로 간주됐다.



 이에 따라 고대 세계의 지식인이자 문자·종교·예술의 수호자였던 제관(祭官)들은 사원에서 쫓겨났다. 상형문자는 더 이상 후손들에게 대물림될 수 없었다. 이집트 남부 아스완의 필라이 사원에 갔더니 394년 사상 마지막으로 상형문자를 새기다 황급히 쫓겨난 흔적이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불관용의 폐해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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