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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우리가 몰랐던 명량해전 승리의 비밀 - 철쇄술과 판옥선이 압승의 원동력

온라인 중앙일보 2014.09.06 00:05
2층으로 건조된 판옥선은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무력화하는 효과적인 전투 수단이었다.


월간중앙영화 <명량>은 역사와 대중문화가 만나 빚어낸 걸작이지만 두 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안에 역사적 사실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영화가 다 보여주지 못한 명량대첩 승리의 명장면들을 <난중일기>를 포함한 한국 사료와 일본 사료를 통해 재조명한다.


명량대첩은 적선끼리 충돌케 하고 백병전을 차단한 전술의 결과물…
육지의 압도적 우위에 도취한 일본, 해상전투 전술에는 무지몽매했다



1597년 음력 9월 17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한판승부를 벌였다. 앞서 6년을 끌어온 동아시아 전쟁의 종결판이기도 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부산포 상륙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꿈꾼 대륙 침략의 서막이었다.



일본에 남아 있는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보면 조선·중국·일본 등 3국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진출할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조선은 싸워야 할 적(敵)이 아니었다. 적수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륙을 정복하는 편리한 ‘길’에 불과했다. 육지의 일본군은 거대한 태풍이 한반도 전역을 휩쓸 듯 조선 곳곳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히데요시와 일본군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이변이 펼쳐졌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남해의 일본 수군을 무참하게 박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1592년 말부터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전세는 일본군에 불리해졌고, 일본군은 거꾸로 남하해야 했다. 1593년부터 명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배제한 채 강화협상을 벌였다. 침략을 받은 당사자인 조선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지만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속셈이 달랐던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히데요시는 다시 침략을 준비했고 그 정보가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다. 다급했던 선조와 조정은 부산포로 진격해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일본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7월 15일, 칠천량에서 전투 중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이 끌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거북선을 포함한 대략 150여 척의 전선이 바다에 가라앉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7월 22일, 조정에 원균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와 신하들은 경악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때 선조와 조정이 낸 해법은 단 하나였다. 명령 불복종으로 내쳤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것이었다. 8월 3일, 120일 동안의 백의종군을 끝내는 재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진주 초계에서 9명의 군관과 함께 전라도 쪽으로 출발해 8월 18일까지 16일간 326.4㎞의 대장정 끝에 장흥 회령포에 도착했다.

그의 대장정은 충격적인 패전에 따라 동요하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길 위에 넘쳐나는 피란민을 위로하고 안심시켰고, 그들 중 자원자를 군사로 모았다. 또 지휘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부하 장수와 지역의 리더들을 모았다. 승려까지 의병장 직첩을 내주며 부족한 군사력을 벌충했다. 나아가 지방의 행정력을 복원시켜 군사를 동원할 준비를 했고, 군량을 확보할 토대를 마련했다. 이순신은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하면서 다가올 결전을 대비해나갔다.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서는 매년 해남군과 진도군의 공동주최로 ‘명량대첩 축제’가 펼쳐진다.
“수군을 없애면 적들이 행운으로 여긴다”



그 사이 선조와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상유십이(尙有十二)’로 상징되는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임진년(1592년)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청도)로 곧바로 돌격하지 못했던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아직도 전선이 12척 있습니다.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전부 폐지한다면, 이는 적들도 행운으로 여기고 호남과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이를 것이니, 신은 이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우리를 감히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以爲幸. 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순신은 18일, ‘아직도’ 남아있다는 그 전선 12척, 명량대첩의 신화를 쓸 12척을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인수했다.



그해 8월 20일부터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12척을 이끌고 소수로 다수를 이길 수 있는 승부처를 찾아 이동했다. 8월 20일 이진(梨津), 24일 도괘(刀掛), 어란(於蘭) 앞바다, 28일 장도(獐島), 29일 벽파진(碧波津), 9월 15일 전라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이동했다. 그리고 9월 16일 드디어 우수영 앞바다 쪽에서 일본 수군과 일전을 치렀다.



이 시기 이순신의 일기에는 그의 엄청난 고통과 승리에 대한 열망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이진으로 이동한 다음날부터 23일까지 3일 동안 “토하고 설사를 하며 심하게 아팠다”고 기록돼 있다. 심지어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절박했지만 물리적인 한계를 체감하면서 겪었던 정신적·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는 일본군은 이순신의 뒤를 따라 시시각각 다가왔고, 수시로 염탐과 기습을 통해 이순신의 수군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과정에서 한 번도 일본군의 기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했던 이유인 ‘경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았고, 철저한 대비를 바탕으로 항상 승리할 수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위험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군대만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통제사로 재임명되자, 울며불며 “이제 우리는 살았다”라고 기뻐했던 백성들의 생명까지 지키려 애썼다. 명량해전 이틀 전, 그는 결전이 임박했음을 예지했는지 임준영의 ‘적선 55척 도착’ 보고와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김중걸(金仲傑)의 이야기를 듣고는 “전령선(傳令船)을 우수영(右水營)에 보내 피란민들이 즉시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투가 벌어질 곳이었던 우수영 인근의 피란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명량대첩을 앞두고서는 꿈 얘기가 보다 선명하게 등장한다. 9월 13일 일기에는 “꿈이 특별해 임진년(1592년)에 크게 이길(大捷) 때와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9월 15일의 일기에는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지시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大捷), 이렇게 하면 패할 것’이라고 했다”는 일기를 남길 정도였다.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 인근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선봉에서 서서 기적 만든 통제사 이순신



최악의 순간을 극복해가며 자신의 최후는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까지 걸린 마지막 전투를 앞둔 날 바로 이순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승리를 위한 불면의 밤이 지속되었고, 비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던 이순신에게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해결책을 제시해준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그 자체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는 전설 같은 일기 기록이다.



출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말했다. “병법에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고, 또한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令)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軍律)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 수 있고, 소수의 인원으로도 대적(大敵)과 싸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명량해협이니 도전해보자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말처럼 13척으로 133척의 일본군 전선과 싸워 승리했다. 그리고 그날 승리 과정을 기록하면서 “아주 천행한 일이었다(天幸天幸)”이라고 감격했다.



하늘이 자신에게 준, 이 땅의 백성에게 준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해 했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간절함이 만든 신화 아닌 신화다. 그날도 그는 두려움에 떠는 부하 장수들을 대신해 최선봉에 서서 싸우며 스스로 기적의 첫 단추를 꿰었다. 그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선봉에 선 이순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둘러쌌다. 상선(上船, 이순신이 탄 지휘선)이 홀로 적선들 속으로 들어갔다.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처럼 쏘아댔지만, 다른 여러 배는 구경만하고 나오지 않아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배 위의 사람들도 서로 바라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논하며 설명하기를, ‘적선이 비록 1천 척일지라도 감히 우리 배로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賊雖千隻 莫敢直搏我船 切勿動心 盡力射賊)’라고 했다. 여러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한 마장(馬場)쯤 뒤로 물러나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멀리 가서 아득히 멀리있었다. 곧바로 배의 방향을 돌려 중군(中軍) 김응함(金應?)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고 효시(梟示)하고 싶었지만, 내가 탄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다른 여러 배는 즉시 더욱더 멀리 물러날 것이고, 적선은 점점 더 다가와 계획하고 기대한 일의 형세가 실패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먼저 구경하던 부하들을 깃발로 불렀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다가오자 이순신은 “네가 명령을 거스르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며 다그치고 “안위야!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친다고 살 수 있느냐!”라며 전투를 독려했다. 안위의 배가 적선에 돌진해 전투를 시작한 뒤 이순신의 수군은 두려움 대신 희망과 승리의 열망을 선택해 결국에는 포위했던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고, 거꾸로 일본군은 공포의 바다로 빠져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고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조된 ‘울돌목 거북배’가 독도에 입항하고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철쇄 전투



이순신이 만든 기적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 자신이 스스로가 “신에게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라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두가 희망을 버렸을 때조차 그는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다’고 까지 극단적인 긍정론을 펼쳤다.



그의 희망과 긍정론의 바탕은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우리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이라는데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자기 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죽음을 초월해 생명의 바다로 나가는 도전을 했고, 그의 열망처럼 승리했다. 때문에 1960년대 이순신 장군을 연구한 최석남 장군은 “나는 아직 명량대해전의 승리를 표현할 만한 어구를 발견치 못하였다. 어떠한 최고형용사를 써야만 그 초인간적인 승리를 표현할지 모르겠다”라고 평가했다.



명량해전 승리의 한 동력인 철쇄(鐵鎖, 쇠사슬) 전투는 영화 <명량>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2004년 가을부터 2005년 여름까지 방송된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명량해전의 기적 같은 승리 원인의 하나로 명량에 걸어놓은 철쇄를 꼽았다. 이 철쇄설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후 160년 동안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연대가 확인 가능한 최초의 기록은 160년 후인 1751년,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저술한 인문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다.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며 철쇄를 돌맥이 다리 위에 가로 걸고 적을 기다렸다.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철쇄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을 보지 못하므로 다리를 넘어갔으려니 하고 순류로 곧장 내려오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다시 돌릴 겨를이 없어 500~600여 척이 일시에 전부 침몰했고 성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택리지>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기록에 철쇄 신화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799년), <현무공실기>(1914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택리지>는 임진왜란 시기와는 너무 먼 후대의 작품이고, 심지어 이중환은 전라도를 가보지 않고 저술했다. 그의 저술 근거는 현재로는 확인 불가능하다.



명량해전 당시의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 1548~1618)가 철쇄를 이용해 일본 전선을 걸려 넘어지게 했다는 최초의 기록이 언급된 <호남절의록>도 신빙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84년에 쓴 <김억추의 묘갈명>에는 철쇄설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택리지>의 철쇄설이 어떤 이유에선지 <호남절의록>이 저술될 때 김억추의 활약으로 추가된 것으로 봐야 한다.



명량해전을 기록한 임진왜란 이후의 가장 오랜 일본 기록으로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가문의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철쇄설은 나오지 않는다. 18세기 이후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야기를 담은 <조선군기(朝鮮軍記)> <회본태합기(?本太閤記)> 등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철쇄설이 19세기 말에 갑자기 나타난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조선을 미리 탐구한 대표적인 인문지리학 서적으로 1888년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이 그 시작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철쇄설 기록 서적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인용된 철쇄설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지지략>의 참고문헌의 하나가 바로 <택리지>였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친필로 쓴 <난중일기>. 연도별로 쓴 총 7권으로 국보 76호로 지정돼 있다.


판옥선 활용 등 전술에서 일본을 압도



일본 해군 역사가 중에서 명량해전 철쇄설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일본 해군 중좌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다. 그가 1904년에 저술한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日本帝?海上?力史講義)>에 철쇄설을 기록한 이후 그는 다른 책을 쓸 때도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철쇄설을 살펴보면 <조선지지략>의 기록에 일부 다른 기록을 합친 것이다.



“만조 시기를 이용해 파도를 타고 (명량)해협을 지나려고 하자, 이순신이 그 틈을 이용해 갑자기 철쇄를 당겼다. 그에 따라 우리 선봉 전선 13척이 뒤집어졌다. 후방의 전선들이 후퇴하려고 했지만 파도를 타고 있었기에 서로 충돌해 부서져 침몰해 매우 낭패한 상황이었다. 그 기회를 타고 이순신은 13척의 전선을 지휘해 바다 위에서 대포로 공격했다. 간 마사가게(菅正蔭)가 전사했고, 선봉대는 산산이 깨졌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해전 전술에서는 주력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이 두드러진다. 반면 일본군은 주력 전선으로 아타케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船)를 활용했고, 접전 전술(Boarding tactics, 적군의 배에 기어 올라가 칼로 싸우는 백병전)을 펼쳤다. 명량해전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펼쳐졌다. 영화 <명량>에서 보여주었던 백병전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상장(上粧), 즉 판옥을 설치했기 때문에 판옥선이라고 한다. 왜구의 배를 격파하기 위해 을묘왜변이 일어난 직후인 명종 10년(1555년)에 개발한 대형 전선이다. 대략 125~130명이 탑승했고, 그중 노를 젓는 격군은 90~100명 정도, 전투 요원인 포를 쏘는 포수와 화살을 쏘는 사수가 30~40명 정도였다.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비전투원인 격군(格軍)은 아래층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요원은 위층에서 격군의 방해 없이 포와 활을 쏠 수 있었다. 크기가 대형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았던 일본 전선에 탄 일본군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성(城)과 같은 판옥선을 기어올라 백병전을 할 수 가 없었다.



또한 판옥선의 외판 두께는 약 12㎝로 상당히 두꺼웠고, 배의 주요 구성부분이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어져 인명살상 유효 사거리 30~50m 정도인 조총탄환으로는 판옥선을 뚫을 수가 없었다. 선체가 튼튼하고 우리의 남서해안 특징인 조수간만의 차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형으로 되어 있어 각종 크기의 화포 사격 시, 포사격에 따른 반동에 영향받지 않았다. 또한 흘수가 낮아 선회 능력이 우수해 함포 사격시 포의 활용도를 높이기에도 편리했다. 높은 곳에서 포사격을 할 수 있어서 명중률도 높았다.



영화 <명량>에 등장한 지자총통.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화포 중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총통이다.
판옥선에 실린 포로는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 총통 등이 있다. 천자총통은 길이 130㎝, 구경 13㎝, 무게 300㎏, 사거리 1.6~2㎞였고, 대장군전(大將軍箭 30㎏)과 철환(鐵丸, 조란환)을 발사했다. 지자총통은 길이 88㎝, 구경 10.3㎝, 사거리 1㎞로 장군전과 철환을 발사했다.



판옥선의 각종 총통으로 일본군과의 직접적 접촉 없이 1㎞ 떨어진 거리에서도 함포사격으로 일본 전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근접전을 피하고 일본군과 간격을 유지하면서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해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해전에서 판옥선이 격파된 사례는 없었다.



반면 일본의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는 바닥이 V자형인 첨저선으로 판옥선에 비해 속도는 빨랐지만 삼나무로 만들어졌고, 두께도 얇았다. 화포를 탑재해 활용하기가 어려워 조총과 칼을 중심으로 전투를 해야 했다. 그나마도 50m의 유효 사거리 정도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유효 사거리 밖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 조선 수군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 전선들은 조선의 함포 사격으로 쉽게 부서졌다.



임진왜란 중 일본 수군의 특기인 접전 전술이 발휘되어 백병전을 했던 사례도 거의 없다. 이는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 해전을 적극 염두에 두지 않아 전선 개발을 소홀히 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명량해전에서 13척이 133척(130여 척)과 싸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 바로 이 판옥선에 있었던 것이다.



현충사 본전에 있는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명량에 등장한 일본 전선 수는 최대 500척?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 수군의 전선 수에 대해 12척이냐 혹은 13척이냐는 논란이 있다. 또한 일본 전선 수도 130척, 133척, 200여 척, 330척, 333척, 500척으로 제각각이다. 이순신이 직접 쓴 명량해전 당일의 일기에서도 차이가 있다.



조선 수군의 경우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직후에 쓴 장계의 내용, 즉 “신에게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인해 12척이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당시 참전한 조선 전선 수는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참전한 조선 전선 수에 대해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차이가 난다. 13척과 12척으로 각기 다른 것이다. 두 실록 기사를 비교해보면, <선조실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추정된다.



“이순신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중요한 입구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해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 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된 자가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1월 10일)



이에 반해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은 12척의 배에다 대포를 싣고는 조수를 타고 순류(順流)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해 달아났다고 했으므로, 수군의 명성이 크게 진동했다(선조30년 9월 1일)”라며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선조실록>의 13척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아도, 이순신이 배설의 12척을 인수한 뒤인 8월 26일 전라우수사로 임명된 김억추가 어란포로 올 때 1척을 타고 와 이순신의 수군 전선이 13척이 된 듯하다.



이순신이 상대한 일본 전선의 수에 대해서도 기록이 각각 다르다. 먼저 두 개가 존재하는 정유년(1597년)의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정유년 1’이라고 칭하는 일기의 9월 16일에서는 “이른 아침에 정찰군사가 들어와, ‘무려 200여 척의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둘러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정유년 2’ 9월 16일 일기에서는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군이 들어와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친 곳으로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 여 척이 우리의 배들을 둘러쌌다”고 했다. 이순신의 일기에서도 133척 혹은 130여 척으로 기록된 것이다.



<선조실록>에서는 ‘정유년 2’처럼 ‘130여 척’으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200여 척’으로 되어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200여 척, <이충무공행록>에서는 333척, <명량대첩비문>에서는 500여 척,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서는 330여 척으로 되어 있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33척 혹은 130여 척이 정확한 듯하다. 기록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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