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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찾을 땐 10번 쪼개서 … 고액 입출금 21% 줄었다

중앙일보 2014.09.04 02:47 종합 7면 지면보기
지난달 서울 강남구 한 시중은행 창구에 들른 40대 남성이 자신의 계좌에서 1000만원을 인출했다. 거래 기록을 살펴보던 직원은 갸우뚱했다. 벌써 나흘째 인근 지점을 돌아가며 매일 2000만원 미만의 자금을 꾸준히 빼간 것. 계좌 주인은 근처 인테리어 업체의 사장이었고, 인출한 자금은 일주일 전 다른 은행에서 송금된 1억원의 일부였다. 당국의 눈을 피해 돈을 잘게 쪼개서 찾은 것이다.


2000만원 이상 당국에 자동보고 탓
작년 상반기 491만 → 올해 387만건
잦은 인출 등 의심거래보고는 증가

고객이 하루에 2000만원 이상의 현금을 입금하거나 출금하면 금융사는 ‘고액현금거래보고’(CTR)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남성은 결국 FIU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점 직원은 “탈세나 자금세탁을 하려는 의심이 든다”며 관련 기록을 FIU에 넘겼다. 수상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의심거래보고’(STR)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지점 관계자는 “일반 고객들 사이에서도 고액의 현금을 거래하는 걸 꺼리는 경향이 뚜렷하다”면서 “자칫 정보가 세무당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걸 의식한 탓”이라고 말했다.





 은행 창구에서 ‘뭉칫돈’을 거래하는 사람이 크게 줄고 있다. FIU의 집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금융권의 CTR 건수는 386만800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91만3000건)에 비해 21% 급감했다. 2010년 상반기에는 600만 건을 넘었지만 이후 차차 감소하다 올 들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가팔라졌다. 지난해 11월 개정 ‘FIU법’(특정금융거래정보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의 여파라는 게 업계의 해석이다.



 법 개정 이전까지 국세청은 주로 FIU가 분석, 가공해 넘겨주는 자료만 활용했다. STR 자료 위주였다. 하지만 이제 보다 자유롭게 FIU가 가진 정보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조세범칙 조사를 위한 목적으로 제한됐던 요청 근거는 세금 탈루 혐의 확인·체납세금 추징 등으로 넓어졌다. CTR 자료도 광범위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경기 위축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장보형 실장은 “부동산 거래가 줄고 기업들도 자금을 풀지 않으니 ‘큰돈’이 덜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수상한 거래’ 보고 건수는 크게 늘었다. 올 상반기 이뤄진 STR은 24만6000건. 지난해 같은 기간(15만5000건)에 비해 59% 급증했다. FIU법을 개정하면서 금융회사의 보고 의무가 생기는 ‘1000만원 이상 거래’라는 금액 기준을 없앤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쪼개기’ 거래가 통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CTR의 급감이 음지(陰地)로 숨는 돈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촘촘한 그물망을 피해 아예 금융사를 거치지 않고 거래되거나 고액권 형태로 장롱이나 대여금고 속에 잠긴 자금이 대표적이다.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이 되돌아오지 않는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7월 5만원권 환수율은 26.3%에 그쳤다. 2012년 61.7%에서 지난해 48.6%로 줄어든 뒤 추락세가 멈추지 않는다. 한은 발권국 관계자는 “단기간의 환수율만 따져 ‘지하자금화’를 거론하는 건 무리”라면서도 “큰 변동이 없던 발행 이후 누적 환수율도 지난해 하반기 이후부터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조민근·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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