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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꺼두고 싶은 내 머릿속의 신호등

중앙일보 2014.09.04 01:11 종합 31면 지면보기
“저는 이미 손쓸 방법이 없는 상태인가요?”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물었다. 그를 치료 중인 의사나 간호사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다섯 개의 보기가 있다. ①“그런 말씀 마시고 조금만 더 힘내세요.” ②“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③“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④“그 정도로 많이 아프시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⑤“이미 끝났구나 하는 기분이 드시는군요.” 『의료의 클리닉』이라는 책을 쓴 일본인 나카가와 요네조는 의료인을 상대로 어느 답을 선택할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의사는 ①을, 간호사는 ③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들은 주로 ⑤를 골랐다.



 ①은 격려다. ③은 난감한 순간에 대한 ‘회피’적 성격을 갖고 있다. 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환자의 말을 확실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대답’이라고 나카가와는 설명한다. 귀 기울여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환자가 불안한 마음을 표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 불안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의사나 간호사가 어차피 병을 치유해줄 수는 없는 상태. 격려·위로·조언이 아닌 상대의 말을 성의껏 듣고 있음을 알려주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다. 심리치료사는 ‘이해받는 과정이 곧 치료 과정’(『공감의 힘』, 데이비드 호우)이라고 표현한다.



 곧 가족·친척·친구들이 모처럼 모인다. 올해 역시 이야기 소재가 풍성하다. 세월호특별법과 유민 아빠, 대통령의 행동과 행적, 군대의 기강, 검사들의 일탈 …. 누군가는 통합진보당 대변인처럼, 또 누군가는 어버이연합 회원처럼 얘기할지 모른다. 때론 격정의 ‘100분 토론’ 참여나 관전도 각오해야 한다. 평소 욕하던 정치판을 똑 닮아간다. 이런 상황이 오면 모두의 머릿속의 신호등이 바쁘게 점멸한다. 말의 앞 대목 몇 마디를 듣는 순간 초록(동의)·빨강(반대)·노랑(애매함) 중 하나의 불이 켜진다. 인터넷 글에 ‘좋아요’나 ‘반대’에 클릭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일단 불이 들어오면, 그 뒤의 말은 언어가 아닌 음향일 뿐이다.



 머릿속 신호등을 꺼두고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기는 쉽지 않다. 공자도 예순이나 되어서야 도달했다는 경지 아닌가. 스위치 작동이 잘 안 된다면 ‘그린 라이트’를 계속 켜두는 것은 어떨까. 가족과 친구에게 지갑을 열기 어렵다면 그렇게 마음이라도 열어야 명절답지 않겠나. 둘 다 화끈하게 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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