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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박근혜 정권의 '비상한 각오'

중앙일보 2014.09.04 01:10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보균
대기자
정치학 개론은 새로 써야 한다. 국회 작동원리가 달라졌다. 과반 다수결의 통상적 의미는 퇴색했다. 국회 선진화법 때문이다. 그 법의 의결요건은 엄격하다. 중(重) 다수결(재적 5분의 3)로 높아졌다. 주요 쟁점들이 거기에 묶여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변형됐다.



 선진화법은 다수당의 개념을 바꿨다. 과반으론 어림없다. 의석수 60%를 넘어야 한다. 새누리당 의원은 158명(전체 52.7%)이다. 그 한계는 뚜렷하다. 실질적인 여당이 되지 못한다.



 국회는 소수파 전성시대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부 견제력은 강화됐다. 선진화법의 위력 덕분이다. 야당의 그 법 활용은 상투적이다. 합법과 횡포 사이를 오간다. 장관들의 야당 눈치 보기는 심해졌다. 제왕적 국회가 등장했다. 그런 권력 위상은 여당도 싫지 않다. 새누리당의 체질은 웰빙이다. 선진화법은 괴물이다. 선진화법은 악성 진화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식물정당이다. 무기력은 자업자득이다. 선진화법은 새누리당의 작품이다. 취지는 몸싸움 방지다. 그 전제는 타협과 양보다. 그 정신은 한국 정치에서 배양되기 힘들다. 이면의 의도는 불순했다. 2012년 선거 패배로 야당이 될 때를 대비했다. 그럴 때 집권당 견제장치로 쓰려고 했다. 상황은 거꾸로다. 새누리당은 제 발등을 찍었다.



 식물국회는 계속된다. 정기국회가 정상화돼도 비슷할 것이다. 민생·서비스·경제 법안의 국회 통과는 힘들다. 야당은 ‘가짜 민생법안’이라고 외면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3일에도 규제개혁을 재촉했다. 하지만 덩어리 규제는 국회 문턱을 넘어야 깨진다. 박 대통령은 경제 회복을 이렇게 다짐한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비상한 생각과 각오로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정권의 ‘비상한 생각과 각오’는 무엇인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이다. 그 영화는 노예제 폐지안(수정헌법)의 의회 통과를 그렸다. 무대는 1865년 미국 하원. 헌법 수정의 정족수는 3분의 2다. 대통령 링컨의 여당으론 20표가 부족했다. 표 채우기는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여야 대치는 극렬했다. 여당 내부는 강온파로 갈렸다.



 링컨은 각개격파에 나섰다. 방식은 정공법과 변칙의 혼합이다. 야당 의원을 설득하고 회유한다. 소통과 압박을 섞는다. 노예 해방은 역사 전진이다. 야당 마음을 잡는 언어는 강렬하다. 거래는 다양하다. 찬성 대가는 낙하산 인사, 지역구 민원 해결이다. 링컨은 3분의 2 장벽을 돌파한다.



법안은 2표 차로 통과됐다. 그 순간의 극적 표현이 있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법안은 부패로 통과됐다.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의 교사(敎唆)와 방조였다.”(새디어스 스티븐슨 하원의원)



 그 은유와 역설은 정치 게임의 내면을 드러낸다. 정권의 성취는 밀실정치에도 의존한다. 의회는 진흙탕이다. 원칙과 진정성을 앞세워야 한다. 세련된 마키아벨리 수법도 동원한다. 그것이 링컨의 진실이다. 비상한 상황은 능소능대(能小能大)한 기량을 주문한다.



 그 장면은 특별하다. 우리 정치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사례는 리더십의 감수성과 교훈을 제공한다. 그것은 용기와 결단, 집념과 비전의 지도력이다.



 정치 환경은 달라졌다. 새누리당은 적응에 실패했다. 선진화법은 정교한 정치력을 요구한다. 그 역량은 원칙과 융통성을 엮어 다져진다. 의지와 각오는 과반수 의결 시절과 달라야 한다. 대다수 여당 의원들은 어설프다. 설득의 정성과 절실함은 떨어진다. 정국 돌파의 전략과 집요함은 미흡하다. 세월호 정국은 다섯 달째다. 민심 흐름을 낚아채는 순발력도 부족하다. 여당의 민생 법안 전선은 허술하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1일 국회에 갔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찾았다. 법안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표는 자리에 없었다. 영화 속 링컨은 밤늦게 야당 의원 집을 찾아간다. 어둠 속 문 앞에 서 있다. 그 모습은 법안 통과의 결연함을 표출한다. 대통령이 다 할 수 없다. 건강한 악역이 있다.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다. 로비와 회유의 해결사다. 그는 링컨 암살 후 다음 정권에서도 국무장관을 맡았다. 슈어드는 알래스카 땅을 러시아로부터 샀다. 거저 주운 헐값이었다. 하지만 그때 ‘얼음 장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위대한 대통령은 탁월한 참모를 거느린다.



 식물국회는 식물정권을 만든다. 악성인자의 전이 속도는 빠르다. 국민의 정권 평가는 경제로 우선한다. 야당에 대한 민심의 반감은 지금 거칠다. 그 책임의 경중은 어느새 나눠질 것이다. 더 큰 책임은 정권과 여당에 돌아간다. 여론의 미묘한 속성이다. 선진화법 장애물이다. 그 돌파가 박근혜 정권의 운명을 가른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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