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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이른 새벽 마을 청소 “남몰래 해야 진짜 봉사죠”

중앙일보 2014.09.04 00:10 10면 지면보기
천안시 불당동 주민들의 사계절 휴식처이자 운동 장소로 사랑 받고 있는 불당초등학교 앞 장재천 산책로가 언제부턴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곳은 매년 여름 저녁이면 아이들과 함께 산책 나온 주민들과 인근 학원가 학생들이 버린 쓰레기가 넘쳐났다. 그런데 5년 전부터 아침만 되면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해진 것이다. 상인들 사이에서 새벽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빨간 모자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불당동 빨간 모자 할머니 조정인씨

신영현 객원기자 young0828@hanmail.net



조정인 할머니가 천안시 불당초등학교 앞 공원에서 갈퀴로 잔디밭을 청소하고 있다. [채원상 기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어김없이 나타나 불당동 산책로와 카페가 밀집된 상가 지역을 깔끔하게 청소한 뒤 사라지는 사람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를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얼마 전 불당동 저녁산책음악회를 취재하던 기자의 눈에 주인공이 들어왔다.



매일 1시간30분 봉사활동



음악회가 끝나고 오후 10시가 다 된 늦은 시각. 관객이 거의 다 돌아갔는데도 그 시간까지 혼자서 주변 청소를 하는 할머니 한 분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서야 비로소 이 분이 2009년 경기도 과천에서 천안으로 이사온 때부터 남몰래 불당동 일대를 청소해 온 빨간 모자의 주인공 조정인(74)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자는 반가움과 궁금증에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조씨를 설득해 수년째 청소 봉사를 하는 이유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달 25일 새벽 5시. 아직도 간밤의 어둠이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이날도 조씨는 아침운동을 나서며 한 손에는 청소용 집게를, 다른 손엔 쓰레기를 담을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인적이 드물어 무서움을 느낄 시간이지만 조씨 곁에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었다. 묵묵히 따라 나서는 남편 문희경(77)씨다.



 조씨가 장재천을 끼고 도는 하천 주변을 청소하기 위해 산책로로 들어서면 문씨는 성당 앞 놀이터에서부터 일대 상가 부근을 1시간30분가량 돌며 밤새 버려진 쓰레기를 모아 청소차량이 가져가기 좋게 자루에 담았다. 이렇게 노부부가 서로 구역을 나눠 불당동을 청소하고 다시 만나는 시간은 조씨가 아침을 준비하러 집으로 돌아오는 오전 7시다.



 “거의 30여 년을 과천에 살며 적십자봉사회에서 활동하다 천안에 살고 있는 여동생의 권유로 불당동으로 이사했어요. 평생 몸에 밴 아침운동을 하러 아파트를 나설 때마다 자꾸 길에 버려진 쓰레기가 눈에 띄어 나도 모르게 주어요. 그래서 아침운동 나올 때 아예 집게와 봉지를 챙기게 됐습니다.”



 새로 이사온 동네가 처음에는 낯설기도 했지만 평소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집에서 멀리 가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장재천 산책로와 봉서산 등산로가 맘에 들어 노년을 이곳에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지난 1월 장재천 옆 상가주택으로 이사했다.



 여고생 때 배구선수를 했을 만큼 운동을 좋아해 젊은 시절부터 수영과 조깅·산책으로 건강을 관리해 온 조씨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유연함과 민첩성을 가졌다고 했다. 그 덕분에 새벽 청소 때도 불당초와 연결된 장채천 다리 아래로 내려가 철조망 사이에 떨어진 쓰레기까지 다 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조씨가 청소하는 모습을 찍은 주민들은 주민센터에 수차례 표창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주민센터가 조씨를 찾아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조씨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40대 초반부터 과천에서 아파트 부녀회장과 대한적십자사 과천지구협의회 봉사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때 6000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해 경기도로부터 20여 차례 표창과 감사패를 받았기 때문에 수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든든한 지원군 가족



“진정한 봉사는 반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해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 도움 없이는 어떤 봉사활동도 오래 하기 힘들죠. 평생을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해 온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보니 이제는 남편도 무조건 나를 도와줍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봉사활동을 지켜보며 흔한 학원 한 번 안 간 아들도 지금은 서울대 의대 연구교수가 돼 나를 지원해 주더군요. 그래서인지 가족의 힘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조씨는 하천 아래를 청소하다 철망에 걸려 다리를 다쳤고, 지난겨울에는 남편이 눈을 치우다 미끄러져 인대가 늘어나 깁스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매일 새벽이면 집을 나선다. 노부부는 매주 화요일마다 동네 청소를 끝낸 뒤 목천에 있는 충남청소년수련원까지 가 인문학 강좌를 듣는다. 수요일에는 천안영상미디어센터에서 추억의 영화를 함께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조씨는 “천안에서 남편과 함께 남들 모르게 조용히 봉사하며 여유롭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제부턴가 남몰래 하는 봉사가 진짜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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