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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가다 ①

온라인 중앙일보 2014.09.02 00:01
3일은 중국의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우리의 광복절이다. 69주년을 맞은 올해 중국은 이날을 법정국가기념일로 격상했다. 지난 2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9월3일을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기념일로 확정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뒤 9월2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당시 중국 국민당은 9월3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법정기념일 첫해인 올해 중국의 공식발표는 없지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등이 참석하는 공식기념행사가 열릴 것으로 외교가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또한 국민당 인사도 초청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개최 장소는 중국에서 주요 행사가 열리는 인민대회당 또는 올해 ‘7ㆍ7사변(노구교(盧溝橋) 사건)’ 77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중국 인민항일전쟁기념관 광장 등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 주석은지난 7ㆍ7 사변 77주년 기념식에서 “누구든 침략 역사를 부정, 왜곡하고 심지어 미화하려 한다면 중국과 각국 인민은 결코 이를 허용치 않을 것”이라며 일본의 과거사 부정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다. 기념일을 앞두고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은 중국 최대 항일전쟁기념관이다. 우리와 비교하면 천안의 독립기념관과 비슷한 성격의 기념관이다. 이곳은 1987년 7월7일 항일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준공됐다. ‘7.7사변’의 발생지인 베이징(北京) 청시(城西)구역의 완핑청(宛平城)에 위치해있다. 부지면적 3만㎡, 건축면적 1만7000㎡, 전시면적은 6000㎡이다. 등소평(鄧小平)이 직접 기념관 이름을 썼다. 현대식으로 된 한백옥 건물이다. 지난 8월26일 이곳은 화단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길이 18m, 높이 5m가량 되는 거대한 구리조각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인ㆍ민병ㆍ노동자ㆍ농민ㆍ소상인ㆍ학생ㆍ부녀ㆍ아동들이 저마다 손에 무기를 들고 서 있다. 천정에는 10여개의 커다란 구리종이 걸려있다. 일본군에 맞서싸우는 경종을 계속 울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항일전쟁 때 중국 인민들이 불렀다는 ‘칼들어 왜놈들의 정통 찌르라, 전국의 애국동포들 항전의 날이 왔다…’ 는 가사의 노래 ‘대도행진가’도 들을 수 있다. 기념관은 3개의 주제 전시관으로 구성돼있다. 1931년 ‘9.18사변’에서부터 1945년 8월 일본군이 투항한 시기까지 항전문물 5000여점, 사진ㆍ자료 3800여점이 전시ㆍ보존돼있다. 항일전쟁 승리 65주년이던 2010년에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들이 단체로 참배하기도 했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민족위기구망흥기’라는 방이 나온다. 입구에 ‘위대승리(偉大勝利)’라고 적힌 글 옆으로 중국의 일본의 침략에 대해 맞서 싸운 기록들이 연대기로 적혀있다.





‘9.18 사변’은 우리에겐 '만주사변'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18일 오후 10시에 봉천(奉天) 부근 유조구(柳條溝)에서 만주철도를 폭파한 뒤 이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소행이라고 조작,만주침략을 감행했다. 당시 일본 7.31부대(일명 마루타부대)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극악한 생체실험을 했다. 당시 페스트와 탄저균 639.5kg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기록돼있다. 흑룡강성 하얼빈 평방(平房)에 위치한 일본 731부대 유적지 본관 건물 현관입구에는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고 적혀있다. 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에도 걸려있는 글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월2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쾨르버 재단 강연 도중 일본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말이기도 하다. ‘과거를 잊지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는 뜻이다.





중국의 1935년 12.9 운동을 형상화한 동판작품이다. 한국의 3.1 운동과 같이 중국도 일본에 대항해 숱하게 싸웠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항일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서안사변'은 중국의 역사를 바꾼 사건 중의 하나다. 만약 이 사건이 터지지않았다면 현재 중국 천안문에는 모택동이 아니라 장개석 사진이 결려있을지도 모른다. 1936년 12월 12일. 당시 국민당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은 장개석 총통을 납치,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장개석은 '선통일,후항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장학량은 일본군의 침략에 먼저 대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안(西安) 화청지(華淸池)에 머물고 있던 장개석을 납치했다.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약속한 후 석방됐다. 장개석은 석방 후 공산당 대표인 주은래(周恩來)와 회담했다. 회담결과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웠다.

사진 위쪽 세사람은 서안사변 담판에 참여했던 중국 공산당 대표들이다. 왼쪽부터 친방셴(秦邦憲ㆍ진방헌),예젠잉(葉劍英ㆍ섭검영), 저우언라이(周恩來ㆍ주은래)다.





1937년 중국공산당 중앙은 항전시기의 강령과 방침을 체계적으로 재정하고자했다. 또한 국민당의 항전노선에 투쟁하고 전 인민을 동원, 항일전쟁을 전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37년 8월 섬서 북부 낙천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 낙천회의에서 중공중앙군사혁명위원회가 11명으로 조직됐다. 서기에는 모택동(毛澤東), 부서기에는 주덕(朱德)과 주은래(위 왼쪽부터)가 각각 임명됐다. 이 낙천회의는 항일전쟁에서 인민이 승리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택동은 1938년 5월 말 연안(延安) 항일전쟁연구회에서 ‘지구전에 대하여(論持久戰)’를 발표, 일본군을 비웃었다. 모택동은 “중일전쟁은 지구전이고 종국적 승리는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 내부에 나타난 주관주의적 태도를 시정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라는 뜻이다. 중국은 실사구시의 논리로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또한 모택동의 ‘실사구시’는 서양의 이론을 중국에 적용,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지뢰전(地雷戰)'을 사전에서 찾으면 ‘지뢰, 수류탄, 폭약 따위로 대상물을 파괴하거나 적의 행동을 저지하는 전투 행동’으로 적혀있다. 만주ㆍ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에 맞서 당시 항일전쟁을 하던 중공군 민병들이 주로 사용한 전법 중 하나가 지뢰전이다. 지뢰전은 1940년, 안국현(安國縣)에 있는 동월(東越)ㆍ서월(西越) 두 마을 민병이 사제 수류탄 2개를 땅에 묻고 인계철선을 설치,일본군 2명을 폭사시킨 이후 중국 전역에 알려져 일본군에 대항했다. 사진은 이를 이용한 화북지역 민병들의 전투장면을 재현해놓은 모습이다. (이후 난진대학살 이후의 기념관 전시는 '르포2'에서 계속된다)







베이징=글ㆍ사진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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