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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듣는 음악…뉴욕필도 이렇게 못 할 것

중앙일보 2014.08.31 18:44


























‘지휘자’ 없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세 개의 독주 악기(피아노·첼로·바이올린)를 위한 반주다. 사실 이들에게 지휘자는 필요 없었다. 악보는 머릿속에 들어있고 서로의 음악이 지휘자일 뿐이다. 이들은 악보가 있어도, 지휘자가 있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이다. 하지만 반주 실력은 손색이 없었다. 곧 단원들과 독주 연주자들의 손놀림·몸짓이 하나가 됐다. 이날 무대에 올린 곡은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딛고 작곡했다는 ‘삼중협주곡’이었다.



서로에게 처음이자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무대였다. 지난달 29일 서울 정동 예원학교에서 협연을 펼친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하트체임버)와 ‘노빌리스 피아노 트리오’의 공연 얘기다. 하트체임버가 비장애인 독주 연주자들의 반주에 나선 것도, 노빌리스 트리오가 시각장애인과 호흡을 맞춘 것도 처음이다.



원래 피아노 트리오는 국내최초 시각장애인 음악학박사이자 클라리넷연주자인 이상재 나사렛대 교수와 협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교수가 자신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하트체임버와 다 같이 무대에 서자고 이들에게 요청했다. 하트체임버는 2011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서 121년만에 첫 암전(暗轉)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트리오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번 공연이 마련됐다. 베토벤 삼중협주곡을 연주하기로 지난 7월 결정이 됐다. 이후 암기와 청각에 의존한 연습이 시작됐다. 먼저 점자로 악보를 읽은 뒤 악기를 연주해보고 이를 외우는 식이었다. 하트체임버 단원 19명 중 12명이 시각장애인이다. 이중 9명은 앞이 전혀 안 보이는 1급이다.



하트체임버가 트리오와 호흡을 맞춘 건 전날 2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하지만 당일 무대에 오르자 이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연주했다. 연습에서 지적됐던 강약조절도 보란듯이 성공했다. 몸으로 리듬을 느끼고 발을 굴러가며 박자를 탔다. 독주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손등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연주를 했다. 38분간에 걸친 연주가 끝났다. 400여 명의 청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고 단원들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20년 지기 친구들로 2004년부터 미국·유럽 등지에서 숱하게 공연을 다닌 트리오에게도 시각장애인과의 연주는 놀라운 경험이다. 피아노를 연주한 스티븐 프루츠먼은 “뉴욕필하모닉·런던심포니도 이렇게 연주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기억에 의존해서 연주가 된다. 정말 강력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프루츠먼은 13세 자폐아 아들을 위해 미국에서 활발히 자선공연을 펼치고 있다. 첼로의 수렌 바그라투니 역시 “나는 악보를 눈으로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무척 사랑하지만 이들처럼 음악을 잘 듣는 능력은 없다. 매우 겸손해졌다”고 말했다. 바이올린 연주자 루제로 알리프란치니는 “음악에 집중해서 연주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들은 불가능한 감각을 개발해냈다. 이날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트체임버는 이날 삼중협주곡에 앞서 루마니아 민속춤과 슬라브 무곡도 무대에 올렸다. 슬라브 무곡은 불을 끄고 연주했다. 들리는 음악에 온전히 집중해보라는 뜻이다. 연회장에서 만난 예원학교 1학년 박준혁(13·작곡)군은 “눈으로 보는 음악보다 마음으로 듣는 음악의 감동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주회가 끝난 뒤 대기실에서 만난 이 교수도 한숨 돌렸다. “남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연습 때보다 오늘 무대에서 훨씬 잘했다. 집중하면 우리도 이만큼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어서 다들 너무 좋아한다.” 하트체임버는 시각장애인(6급까지) 현악기 주자를 모집중이다.

위문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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