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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개혁 성과에 취한 YS, 자신감 넘쳐 교만하다 ‘환란’

중앙선데이 2014.08.31 02:29 390호 26면 지면보기
금융지원 협의차 방한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모습. 한국은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IMF로부터 195억 달러,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각각 70억 달러와 37억 달러를 지원받아 가까스로 외환위기를 넘겼다.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에 100억원짜리 40개 계좌로 분산 예치돼 있다.”

<12> 승부사 김영삼의 좌절

1995년 10월19일 박계동(민주당) 의원의 폭탄 발언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의 차명계좌 3개가 증거로 제시됐다.

연희동 노 전 대통령 측은 처음에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계좌는 없다. 박계동이 헛다리를 짚었다.” 유엔(UN) 참석차 미국에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그 말을 듣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래? 그렇다면 검찰보고 수사하라고 해.”

그러나 박 의원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10월 21일 노 전 대통령과 이현우 전 경호실장, 서동권 전 안기부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자금 통장 가방을 열어보니 문제의 신한은행 통장이 나왔다. 비자금 담당 직원의 실수였다.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이튿날 이현우씨는 검찰에 자진 출두해 사실을 인정했다. 이제 칼은 YS에게 넘어갔다. 불과 3개월 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12·12와 5·18에 면죄부를 주었는데….

그러나 YS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 이를 정면 돌파키로 결심했다. 노태우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전면 수사를 지시하는 한편 12·12와 5·18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1년반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외교 등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우리 경제가 막 1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시점에 온 국민의 에너지와 관심은 죄수복을 입은 두 전직 대통령에게 쏠렸다.

그러나 과연 이 일을 YS가 주도한다는 게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바로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전·노와 손잡고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아닌가. 더구나 그 역시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조만간 그에게도 부메랑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민주계 출신들 한보서 엄청난 정치자금
돌이켜보면 1993년 봄 YS 정권의 출발은 좋았다.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 정책으로 지지율이 90%나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단적 국정 운영과 졸속 정책 추진으로 인해2년 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선 참패를 했다. 세간의 비판 핵심에는 YS의 차남 김현철이 있었다. 그가 사조직을 운영하며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 농단을 부린다는 것이다.

1995년 8월 나는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던 홍준표 검사(현 경남지사)를 만났다. 그는 대뜸 현철씨가 동창관계로 얽힌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얻어 쓰면서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K고 동문인 W그룹 C회장, H그룹 P회장과, K대 동문인 J그룹 J회장, K그룹 후계자인 L씨 등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2년 뒤 IMF 사태를 전후해 도산했다.) 홍 검사는 특히 현철씨가 한보그룹과도 밀착돼 있다고 전했다. 한보그룹은 불과 4년 전(1991년) ‘수서 비리’사건으로 정태수 회장이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는데 최근 재기했다는 것이다.

1997년 1월 30일 한보그룹은 최종 부도 처리됐다. 정태수 총회장은 공금 횡령 및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사진은 97년 4월 대검찰청에 출두하는 모습. [중앙포토]
얼마 뒤 나는 한보그룹이 PK 출신 민주계 세력들에게 엄청난 정치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민주계 좌장 S의원 수하 직원들이 운영하는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보니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는 물론 사업자금까지 한보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노 비자금’ 정국이라 취재가 무르익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홍콩특파원 발령을 받고 떠나기 며칠 전인 1997년 1월 11일, ‘한보 부도 위기설’이 크게 보도됐다. 1993년 6000억원이던 한보철강 부채가 1996년말 4조원을 넘어섰고, 부채비율은 자기자본(2000억여원)의 무려 20배를 초과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대출이나 재무 상태는 사상 유례가 없었다. 그날로부터 12일 후인 1월23일, 한보철강은 5조원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홍콩에 부임한 나는 외국 언론들이 연일 한보사건을 집중 보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훗날 깨닫게 된 것이지만 한보사건은 한국의 정경유착과 관치에 길들여진 부도덕한 금융실태를 낱낱이 노출시켜 세계 투자가들이 한국에서 손을 떼도록 만든 기폭제가 됐다. (1년 후 홍콩스탠다드는 한보사건을 한국의 IMF 사태뿐 아니라 아시아 금융위기의 시발점으로 규정했다.)

임박한 국가 부도 모른 채 허세 부려
당시 홍콩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들은 흥청망청이었다. 소위 YS의 ‘세계화 정책’에 따라 국제금융에 대한 고삐가 풀리면서 무려 83개 금융사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진국 수준의 체재비와 판공비를 쓰지만 영업활동은 후진적이었다. 동남아· 남미· 러시아 등의 고수익·고위험 정크 본드(junk bond)를 거래하고 있었다.

한보사건 이후 한국 경제는 외국 언론에 거의 ‘엉망 수준’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3월 들어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에 대한 비리 수사가 집중 보도됐다.

4월 중순 홍콩 외신기자클럽(FCC)에 들렀을 때 나는 외국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처벌한 현직 대통령 측이 또 다른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실이 맞나?”(키스 리치버그·워싱턴포스트) “뇌물의 단위가 너무 크다. 개인이 받는 돈이 수십만, 수백만달러라니….”(리처드 맥그리거·디 오스트레일리언)

5월 이후 아시아 각국의 독재와 금융 부실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이미 한국에 빌려준 돈의 회수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은 돈이 마르고 도산이 시작됐다.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다음날인 1997년 7월2일, 태국 바트화(貨) 가치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전역으로 금융위기가 번져 나갔고 8월 하순에는 홍콩마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적 위기에도 한국은 오불관언이었다. YS는 아들 현철씨가 구속된 이후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 돼 보이지 않았고, 여론은 이회창 아들 병역문제에 올인하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아무리 외환위기 기사를 송고해도 국민들의 관심은 오로지 대선이었다.

정부는 더욱 한심했다. 9월 홍콩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 온 강경식 경제 부총리는 “한국 경제력에 걸맞는 분담금을 내겠다”며 오히려 IMF 회비 증액 로비에 열중했다. 불과 2개월 뒤 국가부도 위기를 맞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와 인터뷰를 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경제부장 레이 배시포드는 “일국의 경제 총수가 어쩌면 그렇게 상황을 모를 수 있나”며 한탄했다. 당시 IMF 총회에는 미국의 ‘큰 손’ 조지 소로스도 참석했다. 그는 일본 관리들에게 “금융위기 다음 타깃은 한국”이라고 귀띔했다.

10월 말 한국 주가는 결국 500선이 붕괴됐다. 11월 들어 세계 유수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국이 위험하다’고 연일 보도했지만 우리 정부는 전혀 대응을 못했다. 오히려 관리들은 YS 임기 중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겠다며 외환보유고를 바닥상태까지 끌고 갔다. 마침내 우리 외환시장과 증시가 붕괴 상황에 이른 11월 21일 저녁,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하늘은 내편’이라는 자신감이 독
1997년 후반기는 그동안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쌓아온 ‘한강의 기적’이 일순간 거덜 나게 될,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위험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훗날 정부 조사에서 밝혀진 것처럼 YS가 외환위기를 처음 파악한 것은 경제부총리나 경제수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11월 10일 한 국회의원(홍재형)과의 전화 통화에서였다.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아 통치자는 무지했고, 그런 징후를 보고한 부하도 없었다. 나라는 표류하고 있었다.

YS는 20대 의원 시절부터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리와 정이 있었고, 국민의 마음을 읽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야당 투사였다. 그런 그가 왜 대통령 후반기 때 그런 실정(失政)을 하며 추락하게 됐는가.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선 안되지만 외환 위기에 관한 한 YS의 책임은 크다. 그는 측근들과 한보 사이의 유착을 제어하지 못했고, ‘세계화’란 명목 하에 세심한 고려 없이 자본시장을 덜컥 개방해버렸을 뿐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한국 경제가 곪고 썩어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야당투사로서 비판과 대통령으로서 국정운영은 전혀 다른 세계다. 박정희가 그 어려운 시절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며 시대적 악역을 자처하고 좁은 길을 헤쳐 나갔던 것과 달리, YS는 거칠 것이 없는 탄탄대로의 넓은 길(大道無門)을 걸어갔다. 누구보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은 DJ(김대중)지만 대통령이 된 뒤 꾹 참고 보복을 하지 않은 것과 달리 YS는 군사정권과 손을 잡고 집권하고서도 한 순간에 그들을 내쳐 버렸다.

YS의 그 같은 과단성, 즉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처럼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명문교를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다 됐고, 하늘은 항상 자기편이라고 자신(自信)했을 성 싶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결국 대통령이 된 뒤 국정 운영에는 독(毒)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마음 속에는 ‘국민을 섬기는’ 겸손보다 ‘내가 최고’라는 교만이 자리 잡아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고, 주위의 판단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 아닐까.

등산을 즐긴 YS는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어렵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그는 대통령이란 인생 최고 목표를 이루고 하산하다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의 말이 생각난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하고 영웅이 됐지만 평생 후진국 네팔에서 봉사하다가 타계한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인간이라는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등정을 통해 겸손과 관용을 배웠다는 점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YS가 저 힐러리경(卿)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또 우리 각자의 인생은…. 외환 위기가 한국 사회에 너무 많은 상처와 그늘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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