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n Sunday] 누가 영재의 뇌를 일찍 불태웠나

중앙선데이 2014.08.31 03:05 390호 31면 지면보기
머리도 좋은데 노력까지 하는 영재들, 정말 생각만 해도 얄밉다. 얼마 전 끝내주게 얄미운 친구와 재회했다. 고등학교 때 학원 한 번 안 다녀도 머리가 좋아 공부를 곧잘 하더니 대학 가서도 학점은 늘 4.0(평균 A)을 넘었다. 그러던 친구가 취직을 한 뒤론 학습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요즘 일반 직장인들이 인문학과 순수 과학 열기에 빠져 일일 강좌를 듣거나 대학원 진학까지 고려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지쳐서 공부하기 싫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했다. ‘지겨워서’가 아니라 ‘지쳐서’라고 했다. 하다못해 영어책 한 번 들여다볼까 싶어도 딱히 내키지도 않고 심지어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예전의 그 천재 소리 듣던 친구가 맞나 싶었다.

그는 “영재 또는 천재라 불리던 사람들의 머리는 우리나라 교육 여건 상 빨리 소진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과학고·민족사관고 동기들의 예도 들었다. 10대 때 다 써버렸다는 거였다. “1등을 지켜야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쓸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시험이 끝나면 ‘머리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라고 광고하던 모 음료수를 늘 마셨다고 했다. 그거라도 마셔야 두통이 가셨다는 거다. 만화 『내일의 죠』의 대사 “하얗게 불태웠어”를 읊조리며 말이다.

보상의 문제도 있었다. 이전까지는 1등, 100점과 같은 산술적인 보상이 있었다. ‘수능을 잘 보면’ 또는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뚜렷한 결과가 있었다. 그것이 10대에 주입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던 셈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던 과목을 더 파고들어봤자 ‘최고 권위자가 될 수는 없다’는 현실을 빨리 깨우쳤다고 했다. 그래서 더 이상 학습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다른 동기들도 지금은 공부라면 손사레를 친다고 했다. 10대 때 앓았던 학습 과잉의 대가가 컸던 셈이다.

듣고 보니 김두식·김대식 교수 형제의 『공부논쟁』에 나오는 ‘번 아웃(Burn out)’이란 용어와도 뜻이 통했다. 학습 능력과 의지가 모두 방전돼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두 교수 또한 그 원인을 ‘고등학교 때 1등한 것으로, 평생 먹고 사는 지위가 확보되는 사회 구조’에서 찾았다. 인생을 통틀어 10대때 몇 년만 바짝 공부하면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때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곧게 자란 ‘만들어진 영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조차도 나중에는 지쳐서 더 이상 학습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타고난 천재 가운데도 끊임없이 공부해서 유능한 인재로 성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 영재들을 게으르다고만 치부할 수도 없다. 반짝반짝 빛나는 영재들의 머리를 온전히 그들 대학 진학에만 쏟아 붓도록 하는 건 사회 전체적으로도 좀 안타깝지 않은가. 지쳐서 머리를 못쓰겠다는 영재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요즈음이다.


유재연 사회부문 기자 queen@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