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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담배 끊은 지 10년 … 영화는 아직도 골초

중앙일보 2014.08.28 01:56 종합 18면 지면보기
지난 8일(금요일) 자정 무렵 서울 서초구의 A중학교 운동장 농구코트. 10대 학생 열댓 명이 모였다. 이내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모(18·고3)군은 지난해 컴퓨터로 내려받아 본 영화 ‘신세계’를 떠올렸다. 양복 차림에 담배를 쥔 거친 손, 연기를 내뿜는 눈빛…. 영화 속의 남자배우는 최고로 보였다.


[건강한 목요일] 청소년 흡연 부추기는 영화
15세 관람 '도둑들' 12분 넘게 뻐끔
'범죄와의 전쟁' 선 흡연 장면 48분

 “저걸 저렇게 빠는구나. 간지난다(폼이 난다). 나도 저렇게 피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비슷한 시각 A중학교 뒤쪽 공원에서 만난 곽모(18·고3)양은 “영화 매니어거든요. 영화에서 구겨진 담배를 깊게 빨면서 피우는데 죽여줬어요”라고 말했다. 몇 번 담배를 끊으려 시도했으나 영화 때문에 실패했다고도 했다.



 2004년 지상파TV에서 담배가 사라졌다. 그러나 영화 스크린은 아직 흡연의 무풍지대다. 본지가 최근 5년간 400만 이상 관객이 찾은 한국 영화 6편의 흡연 장면을 분석했다. 그 결과 ‘도둑들’에는 28회에 걸쳐 12분43초, ‘범죄와의 전쟁’에는 56회에 걸쳐 48분15초 동안 흡연 장면이 노출됐다. ‘범죄와의 전쟁’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지만 청소년들이 인터넷에서 쉽게 내려받아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금연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영화 속 흡연 장면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속 흡연이 청소년 흡연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국내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지난해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보건사회연구』에서다. 질병관리본부 김이경 연구원은 지난해 말 영화 속 흡연 장면 노출 정도에 따라 고교생·대학생 1075명을 4개 그룹으로 나눠 분석했다. 가장 많이 노출된 그룹이 가장 적게 노출된 그룹에 비해 흡연율이 38.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 연구원은 “영화 속 흡연 장면이 청소년의 흡연을 조장한다는 사실이 국내에서는 처음 확인됐다”며 규제론을 폈다.



 미국 영화계는 흡연 장면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이미 시작했다. 6개 주요 영화제작사를 대표하는 민간단체인 미국영화협회(MPAA)는 2007년 “폭력·성(性)뿐만 아니라 영화 등급 평가에 (흡연을) 중요한 요소로 적용하겠다”며 자율 규제 방침을 천명했다. 영화사 디즈니는 가족영화에서 흡연 장면을 없앴고 20세기 폭스는 13세 이상만 볼 수 있는 등급(PG-13)의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자체 규정을 만들었다. 미국유산재단(ALF)에 따르면 올해 발표한 미국 10대 흡연율은 9%였다. 2000년(23%)보다 크게 떨어졌다.





 이달 21일 서울 태평로의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담배 규제와 법’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자로 나선 샤론 유뱅스 변호사는 “영화의 흡연 장면은 청소년의 흡연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와 관계없는 흡연 장면은 금지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검사 시절 연방정부의 첫 담배 소송을 주도한 인물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1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영화 속 흡연 장면이 청소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며 “흡연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성인영화에 한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내 청소년(중1~고3) 흡연율은 지난해 9.7%다. 남학생의 흡연율은 14.4%다. 특히 고3의 흡연율은 25%인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남성 평균 흡연율(20.3%)보다 높다.



 한국은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영화 등급을 판정할 때 선정성·폭력성·약물 등 일곱 가지 분야를 따진다. 담배는 약물 중 하나로 분류된다. 일곱 가지 요소가 없거나 매우 약하면 전체 관람가, 경미하고 간결하면 12세 관람가, 지속적·구체적이지 않으면 15세 관람가, 구체적·직접적·노골적이면 청소년 관람 불가로 분류한다. 다른 요소와 함께 고려하기 때문에 흡연 장면은 등급 결정의 핵심 잣대가 아니다.



 이런 구조적 한계 때문에 한국 영화에는 흡연 장면이 많다. 동덕여대 정민수(보건관리학) 교수가 2000~2013년 관객이 500만 명을 넘은 국내 개봉작(수입 영화 포함) 51편을 6월에 조사했다. 같은 등급의 영화를 비교했더니 한국 영화의 흡연 장면이 미국 영화의 1.37배였다. 논문은 “15세 관람가 영화에도 흡연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런 장면이 청소년 흡연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영화계는 영화 속 흡연 장면을 제한하면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스토리를 전개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되거나 꼭 필요한 장면이 적지 않다”며 “규제의 잣대가 영화의 다양성과 작품성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홍관 한국금연운동협회 회장은 “스토리나 연기로 표현할 대목을 너무 쉽게 담배 피우는 장면으로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김혜미 기자, 김호정(중앙대 광고홍보학과)

이하은(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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