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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멋대로 기준 세워 반덤핑 관세 … 강관업계 휘청

중앙일보 2014.08.28 01:11 경제 4면 지면보기
국내 유정용강관(OCTG) 업계는 요즘 침울하다. 미국에서 9.89~15.75%의 반덤핑 관세를 맞게 됐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며 “큰 타격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올 2월 하이스코·넥스틸 0% 판정
철강 업계·노조, 정치권 압박하자
5개월 만에 15.7%·9.8% 부과
"이익금 26% 안 되면 덤핑인 셈"

 OCTG는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시추·운반에 쓰이는 파이프다. 최근 미국에서 셰일가스 붐이 일면서 수요가 증가해 한국 철강의 수출 주력 품목으로 부상했다. 한국산 OCTG를 쓰는 시장은 미국과 캐나다뿐인데, 캐나다 시장은 워낙 미미해 미국 시장이 막히면 한국산 OCTG 업계엔 치명적이다.



 반덤핑 판정 자체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판정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미국 통상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리수들이 개입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유에스스틸 등 미국 철강업체 9개사가 하이스코와 넥스틸 등 한국 업체들을 덤핑으로 제소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미 상무부가 반년 이상 조사 끝에 내린 올 2월의 예비 판정 결과는 무혐의였다. 당시 하이스코와 넥스틸은 덤핑 마진이 제로(0)퍼센트로 나왔는데, 실상은 하이스코는 -8.6%, 넥스틸은 -10%였다. 외려 값을 비싸게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7월 상무부는 하이스코가 15.75%, 넥스틸이 9.89%의 덤핑을 하고 있다고 최종판정을 내렸다.



 5개월만의 대반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스터리의 열쇠는 미국 정치권이었다. 예비판정이 나오자 미국 상하원의 상무부 압박이 시작됐다. 5월에 상원의 절반이 넘는 57명이 연대서명한 편지를 프리츠커 장관에게 보냈다. “예비판정이 잘못됐으니 재고하라”는 내용이었다. 6월에는 하원의 35%가 넘는 155명이 유사한 압력성 편지에 서명했다. 정치권을 움직인 것은 미국 철강업계와 노조였다. 이들은 오바마 정부가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11월 중간선거가 다가왔다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상무부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소업체들은 애초 하이스코와 넥스틸이 미국 거래업체들과 계열관계에 있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쳤는데, 상무부가 이 주장을 검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상무부의 질문은 방대했다. 반면에 답변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 비상식적인 검증방법이었다. 이는 답변 준비를 힘들게 해, 덤핑이 아니라는 항변을 포기시키겠다는 ‘기업 괴롭히기’ 작전이었다. 거래 업체들은 5주 만에 3500페이지의 답변서를 제출하는 곤욕을 치렀다.



 의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상무부가 마지막에 쓴 카드는 마진율 산정 방식 변경이었다. 통상 덤핑은 자국 시장 가격과 수출 시장 가격을 비교해 판단한다. 그러나 한국 업체들은 국내 시장에 OCTG를 팔지 않는다. 이럴 때는 국내 시장의 유사 제품이나 동종 업체의 마진율을 쓴다. 그러나 상무부는 세계 OCTG업체 중 최고 이익률을 자랑하는 테나리스 사의 마진율을 적용했다. 테나리스는 한국 시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다 한국 업체들과 달리 프리미엄 제품을 팔고 있어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상무부가 20여 년간 고수해온 덤핑률 산정 방식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었다. 상무부는 테나리스사의 이익률 26%를 기준으로 덤핑률을 계산했고, 한국 업체들에겐 9.89~15.75%의 덤핑 판정이 떨어졌다.



아킨 검프 로펌의 데이비드 박 변호사는 이번 케이스를 “정치적 압력에 의해 미국 정부가 입장을 번복한 것으로 유례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업계는 미국 국제무역법원에 제소할 방침이다. 정부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



 정작 더 큰 고민은 이번 OCTG 케이스가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거가 희박해도 덤핑으로 걸고 보는 일이 속출할 수 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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