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북을 열며] 양동이를 걷어차는 대신

중앙일보 2014.08.28 01:04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영어 단어 ‘버킷(bucket)’은 손잡이 달린 들통이나 양동이를 뜻한다. 예전에 어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바께스’라고 부르던 물건이다. 학창 시절 별별 희한한 영어 단어를 밑줄 치며 외웠건만, 이런 생활용품을 영어로 뭐라 부르는지는 배운 기억이 없다.



이 단어를 비로소 알게 된 건 2008년 개봉한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란 영화 덕이다. 각각 모건 프리먼과 잭 니컬슨이 연기한 가난한 정비공과 엄청난 부자가 우연히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되고, 이들은 병원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각자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러 나가자고 뜻을 모은다. ‘버킷 리스트’는 그런 일들을 적은 목록을 가리킨다. 이는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 양동이를 걷어차다)이란 속어 표현이 죽는 걸 뜻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데, 이 표현이 왜 이런 뜻이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세 때 사형수를 양동이 위에 서게 하고 목에 밧줄을 건 뒤 이를 걷어찬 데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으니 그리 아름다운 유래는 아니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는 이름의 미국발 릴레이 기부 캠페인이 한국에서도 붐을 일으켰다. 한시가 멀다 하고 연예인·운동선수·정치인 등등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모습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쏟아진다. 일각에선 스타들의 인맥 자랑이라는 둥, 명사들만의 이벤트라는 둥,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관련 단체를 후원하는 본래 취지와 달리 개인이나 상품의 홍보에 쓰이기도 한다는 둥 비판도 늘어간다.



개인적으로는 ‘적선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우리네 속담이 먼저 떠오른다. 유명인들이 기왕에 치르는 유명세를 좋은 일에 쓰는 건 질시할 일이 결코 아니란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 캠페인은 SNS의 속성을 적극 활용해 놀라운 파급력을 발휘한 사례란 점이 단연 흥미롭다. 다만 사회적 후원이 필요한 다른 영역에도 관심을 갖자거나, 지구촌에는 물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이들이 있다는 지적에는 귀가 기울여진다.



 얼마 전 이 캠페인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했다.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청년 한 사람이 무너진 건물 잔해 앞에서 얼음물 대신 잔해에서 퍼 담은 흙더미를 뒤집어쓰는 동영상이다. 청년은 기부 대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담담하게 호소했다.



참으로 모순된 세상이다. 한편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환우들을 돕겠다는 선의가 릴레이로 번지는데, 다른 한편에선 얼굴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적의를 불태우고 폭격을 퍼붓는 살상극이 벌어진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SNS를 통해 클릭 한 번으로 이른바 ‘친구’가 되는 이 시대에도 인류는 전쟁이란 이름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악습을 거듭한다. 세계 평화를 인류 공통의 버킷 리스트에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