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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나라서 만난 모국어, 기적같지 않나요

중앙일보 2014.08.25 01:32 종합 25면 지면보기
정이현 소설의 매력은 단연 생생하고 섬세한 묘사다. 그는 “소설은 구체적이고, 사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사람 몸을 표현한다면 몸 전체가 아니라 ‘그의 손톱 끝에 낀 때’에서 시작하는 게 내가 배운 소설”이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이현의 ‘영영, 여름’은 이번 황순원 문학상 예심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됐다. 예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최고라고 극찬한 위원이 있었는가 하면, 작가의 최고 작품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왔다. 긴 토론과 표결 끝에 본심작으로 선정됐다.

[미당·황순원문학상] 소설-정이현 '영영, 여름'



 ‘영영, 여름’은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한 소녀의 이야기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주인공 ‘리에’는 뚱뚱하고 소심한 외톨이 소녀다. 엄마는 낯선 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리에와도 한국어로만 대화한다. 엄마는 딸의 체중에 지나칠 만큼 집착한다. 리에 가족은 아빠의 해외 발령으로 남태평양 부근의 ‘영영, 여름’인 나라 K로 이사한다. 리에는 K의 국제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는 외톨이 메이를 만난다. ‘말이 통하는’ 두 소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고 둘은 이별한다. 그 과정에서 메이가 북한 권력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영영, 여름’은 예의 정이현 소설답게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는 글맛을 담뿍 느끼게 한다.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정이현 특유의 단정한 문장과 흥미로운 세부 표현, 안정적인 전개가 돋보이는 ‘잘 읽히는 소설’의 좋은 사례”라고 평했다.



 예심에서 논쟁이 됐던 부분은 ‘메이’의 국적이다. 예심 위원들은 다소 낯익은 소설의 테마가 결말에 놓인 ‘남북 문제’로 인해 몇 겹의 의미를 얻게 됐다고 높이 샀다. 반면, 이 소설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오히려 ‘남북 문제’로 함몰되게 하는 과도한 결말이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이현은 “독자 입장에선 ‘남북 문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로서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코스모폴리탄도 아닌 한 소녀가 여름 나라에 갇혀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이야기와 모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겹쳐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어는 변방의 소수 언어잖아요. 한국어를 쓰는 우리끼리 책을 쓰고, 읽고, 완벽하게 의사소통하는 게 기적 같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나라 밖에선 유일하게 북한 사람들과 말이 통하잖아요. 이데올로기를 떠나 한 교실에 북한 아이와 또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다른 아이가 있다는, 모국어에 대한 상상력을 담은 거죠.”



 정이현은 변신을 거듭해 왔다. “『달콤한 나의 도시』 이후에 밝고 발랄한 이미지를 벗으려고 애썼어요. 과분한 사랑을 받아 감사한 작품이지만 거기에 고정될까봐 두려웠죠.” 그런 노력 끝에 2009년 장편 『너는 모른다』를 냈다. 유괴, 장기 밀매, 가족 파괴 등 암울한 소재가 겹겹이 엮인 작품이다. “정이현이 왜 이렇게 어둡고 기분 나쁜 이야기를 썼느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예전엔 의식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 이후론 자유로워졌어요.”



 그는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엄마가 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했다. “유명한 여자 작가 선배가 ‘아이 낳고 7년간 안 썼더니 아예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임신하고 아이를 기르면서도 무리해서 더 열심히 썼어요. 두 아이 임신 중에 장편을 각각 한 편씩 썼죠. 너무 밤을 새서 하혈까지 해가면서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조급했을까 싶은데, 그런 과정을 겪고나니 단시간 최고로 빠르게 뛸 게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라톤 완주하듯이 소설과 평생 같이, 멈추지 않고 함께 가고 싶어요.”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이현=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안녕, 내 모든 것』. 이효석문학상·현대문학상·오늘의젊은예술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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