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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예외성의 덫' 으로부터 해방을 모색하며

중앙일보 2014.08.25 00:42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천하대란에 가까이 다가선 오늘의 세계정세이다.

냉전 후 동서화합의 모범을 보이는 듯싶던 유럽에서 분열과 내전에 휩싸인 우크라이나 사태, 말레이시아 민간 여객기 격추사건,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무차별 포격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의 종교와 부족 갈등으로 뒤얽힌 학살의 참상, 아프리카에서 확산되고 있는 에볼라바이러스…. 이렇듯 지구촌 곳곳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사건을 열거해보면 우리는 정녕 천하대란의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난 100여 년 수없이 많은 내우외환을 겪어 온 우리로서는 오늘의 심상치 않은 국제정세와 남북 대치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분열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불길한 생각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 특히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이냐에 대한 인간의 자율적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고 믿기에 결코 패배주의적 숙명론에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우리가 ‘예외성의 대가’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역사의 도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혹독한 ‘예외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지난달(7월 14일 칼럼)에 지적한 바 있다. 제3세계 국가들이 경험한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은 근대화를 세계사의 주류에, 즉 시장경제와 민주화에 맞추어 추진한 데 비해 북한은 ‘우리식’을 고집하며 극심한 예외화로 고립의 늪에 빠져들었다.

한 세대 안에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 그리고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개방의 결단을 내린 덩샤오핑의 중국을 지켜보던 1994년 6월의 김일성은 아마도 치명적 수준에 달한 북한 예외화의 대가를 대폭 감소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러한 결단의 시간을 오늘의 김정은에게도 기대하게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예외화의 대가’ 또는 ‘예외화의 저주’에 묶여 있는 것은 북한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이며 한민족이란 관점이다. 분단 70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민족이 그러한 예외성을 극복하려면 결국 남과 북이 함께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예외성의 극복을 위해서는 예외적 발상에 따른 해결책 및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고려대 임혁백 교수는 근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와 평화』에서 주장했다. 그는 기능주의적 교류, 교환, 교역의 파급효과가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낸 유럽의 경우와 달리 한반도에서는 대치상태의 지속이란 역류효과만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예외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의적인 개방성에 입각해 남북 교착상태로부터의 출구전략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재작년 세상을 떠난 사회과학자 앨버트 허시먼(Hirschman)의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을, 절망에서 희망을 찾는 독자적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임 교수는 강조한다.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 큰 영향력을 끼친 허시먼의 이론을 원용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확실성이나 상투적 이념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열린 개방주의와 회의적 절충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면 상황의 기이성이나 변칙성에서 오히려 예측하지 못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그의 입장은 답답한 남북 대치에 얽매여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마지막 숙제인 한반도 분단 상황은 유난히 예외성이 강한 문제다. 그러기에 통일된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정치적 일괄타결이 남북 간에 그리고 관계국 간에 합의돼야만 한다. 이를 위한 창의적이며 과감한 노력은 우리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면 그만큼 창의력이 발동할 여지가 클 것이고 일찍이 세계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타협과 합의의 생산성을 경험한 쪽이 먼저 시동을 거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분노를 금치 못할 만큼 사방에 부정·부패·폭행 등 실망스러운 추세가 널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00만 대군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60년 넘게 대치하고 있는 극단적 예외성에서 기죽지 않고 끈질기게 평화와 통일을 꿈꾸고 있는 이 민족을 천하대란에 허덕이는 오늘의 지구촌에서 누구도 쉽게 외면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예외성의 덫’으로부터 한사코 벗어나려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몸부림이 한반도와 아시아 평화시대의 문을 여는 역사적 비약을 가능케 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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