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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중앙일보 2014.08.23 00:08 종합 30면 지면보기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아니, 어떻게 1면 톱 제목이 틀릴 수 있나요?” 독자에게서 메일이 몇 통 왔습니다. 명동성당 평화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죄 지은 형제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오복음 18장 21~22절 )”고 한 대목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가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실제 개신교 성경에는 그렇게 표기돼 있습니다. 가톨릭 성경과 다릅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성서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는 “처음 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될 때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았다. 대신 약속된 알파벳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가령 알파벳 문자로 ‘7·10·7’이라고 적은 셈이다. 가톨릭에선 그걸 있는 그대로 읽어서 ‘칠·십·칠(77)’로 해석하고, 개신교에서는 숫자 사이에 생략된 산술 부호가 있다고 보고 ‘7×10×7’로 본 거다. 예수님의 평소 어법에 비춰볼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 더 맞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횟수는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가 강조한 것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용서, 말은 참 쉽습니다.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미운 사람을 490번이나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성자인 예수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반박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우리는 용서의 이유를 절반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용서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따져보세요. 남을 미워할 때, 남에게 분노할 때 내 안에서 독기가 올라옵니다. 그 독기는 나를 먼저 취하게 합니다. 나를 먼저 망칩니다. 그래서 용서도 남을 해독하기 전에 나를 먼저 해독하는 겁니다. 그걸 정확하게 안다면 무한한 용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났습니다. 화해와 용서, 소통을 강조했던 행보 때문일까요. 교황이 떠난 직후에 여당과 야당은 세월호특별법 재합의안을 내놓았습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여야의 재합의안을 거부했습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진상조사위원회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세월호’를 진정성 있게 다루지 못했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은 겁니다.



 정치권은 난감합니다. 기소권과 수사권은 검찰과 경찰의 몫입니다. 진상위에 그걸 준다면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안한 게 특검입니다. 이번에는 특검 추천권을 놓고 여와 야,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입장이 갈립니다. 앞으로 가도 ‘쿵!’, 뒤로 가도 ‘쿵!’, 옆으로 가도 ‘쿵!’ 하고 부딪힙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누군가 ‘통 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이 트입니다. 그 주체가 여당일 수도, 야당일 수도, 세월호 유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제 슬픔과 아픔의 당사자만이 아닙니다. 그런 위로의 대상만은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가적 난제를 풀 해결책의 한 축에 서 있습니다. 여당은 재합의안에 대해 “간도 쓸개도 빼주는 심정으로 양보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그런 양보를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고 한 겁니다.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 강경파의 협상 비난에 무릎을 꿇어선 안 됩니다. 그럼 세월호 문제를 영영 풀 수가 없을 테니까요.



 팽팽한 줄다리기를 멈추려면 누군가 한쪽에서 대범하게 줄을 놓아줘야 합니다.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건 ‘통 큰 마음’을 먹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그게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는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념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꺼내는 카드가 ‘용서’니까요. 그 용서는 결국 누구를 위한 걸까요. 여당도, 야당도, 세월호 유가족도 아닙니다. 그건 대한민국 전체를 위하는 겁니다. 그 숨통을 트는 일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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