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슲이 울어주든 누이를 생각하면 가슴에 차올라 마음 둘 곳 몰라라"
귀국 앞둔 벅찬 감정, 시와 수필 속에 넘쳐
"(전략) 1945년 12월 26일에는 우리가 기나긴 하와이 생활 전부를 영원한 추억거리로 싸담고 모국의 항구 인천으로 향하야 출발할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전날 수용소 캠프 책임자인 해롤드 하월 대위가 대표 30명을 불러 귀국일자를 확인해 준 것이다. 전쟁과 노역, 그리고 숨막히는 포로수용소 생활 속에서 귀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 감격은 이렇게 이어진다. (해석 가능한 당시 표기 그대로 인용함)
"오래지 않아 우리는 (중략) 부모형제의 나라에서 몸을 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땀으로 파든 흙냄새도 맡어보고 (중략) 내 아들은 아즉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엇쓸 것이며, 내 마누라는 또 내 삼베옷에다 거쎈 풀을 멕여서 입혀주리라. 아즉도 주막에서 동무를 만나면 막걸리 한잔쯤은 마실 수 잇껫지…모든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요,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고향의 산천·가족·친구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도 비친다. 오랫동안 가지 못한 고향에 돌아가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빈 손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복잡한 심정이었으리라. 구한말부터 유행한 신체시(新體詩)의 형식을 빌려 그리움과 애잔한 추억을 노래하기도 했다. 귀국을 한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45년 12월 2일 발간된 자유한인보 5호에는 서경암이란 필자가 '고향행 소식'이란 시를 남겼다.
"여기는 어데냐 꿈이냐 생시냐/ 외로웁고 이상한 타국 고도에/ 밤마다 쳐다보는 밝은 저 달은/사랑하는 향토에 비춰주지만 (중략) 순풍에 돗을 다라 뱃머리를 돌려서/ 그리운 옥토강산 속키 가보새"
같은 필자의 '버린 고향'이란 시도 있다.
"버린 고향이 그러케 그리워서/기타줄을 골나매고 한곡조 타니/아버지 생각 어머니 생각/눈물 줄기 흘여서 앞을 가리니/꼬리 치며 집에 남은 얼룩이도 잘 있는냐(하략)"
박순동이 쓴 '추억 일편-깩짜리 캐든 날'은 징용으로 끌려오기 전 열일곱살 누이와 '깩짜리'를 캐며 나누었던 추억과 징집되며 헤어졌던 기억을 가슴시리게 묘사했다.
"겨울 추위가 풀리고 보리가 자랄려고 몸을 펼 때쯤 되면 나는 해마다 깩짜리 캐기에 힘들었었다. 보리밭 꼬랑에 피는 독새풀을 캐서 베거름을 장만하는 것이다. (중략) 그때 열일곱살 살인 누이도 깩짜리 망태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란 그리 허고 싶은 일이 않이엿쓸 껏이다. 그래서 가끔은 논뚝에 걸터 안저서 먼 산을 처다보면서 서로 다른 생각에 넋을 일코 있뜬 때도 많엇다. (중략) 지금부터 2년 전 내가 갈 바도 모르고 집을 떠날 때 누이는 벌써 네 어린애의 어머니엿다. 그때에 슲이 울어주든 누이를 생각하면 같이 철없는 이야기를 하든 날의 생각이 구름같이 가슴에 차올라서 마음 둘 곳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가족과 사람들, 조국 강토에 대한 향수가 구절구절 배어 나온다. 수용되어 있던 2700명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전쟁통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가 고향으로 갈 귀국선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순간, 그들은 누구라도 서정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원영 LA중앙일보 기자 sk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