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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할머니들 "틀니 하니 꽃보다 곱네"

중앙일보 2014.08.18 01:19 종합 25면 지면보기
헤 알렉산드라 할머니(왼쪽)가 새로 한 틀니를 끼고 권호범 교수와 함께 웃고 있다. [사진 ㈜두산]
“틀니를 해넣으니 내가 꽃보다 고와요.”


서울대치과병원·두산 의료봉사단
우즈베크서 첫 무료 틀니 지원

 지난 14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의과대학병원. 헤 알렉산드라(80) 할머니가 새 틀니를 낀 채 웃었다. 오가이 라이사(80) 할머니는 신이 나서 몸을 들썩였다. 두 할머니는 고려인 1세대다. 1937년 소련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크로 넘어왔다.



 서울대치과병원(원장 류인철) 의사·치과위생사와 ㈜두산 관계자 등 19명으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은 지난 10일부터 7박9일간 우즈베크에서 처음으로 무료 틀니 지원사업을 벌였다. 고려인 12명을 포함해 총 26명에게 틀니를 맞춰주고 취약계층 아동 150여 명의 치과 진료를 도왔다.



 병원 복도에는 북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강제 이주 전 연해주에서 쓰던 말이다. “이제 아이(아니) 아파요. 일 없습니다(괜찮습니다).” 텐 마리아(88) 할머니의 혀끝에는 피가 뭉쳐 생긴 ‘빨간 점’이 있다. 오래전에 맞춘 틀니가 잘 맞지 않아 음식을 먹을 때마다 혀를 같이 씹어 생긴 상처다. 텐 할머니는 “한국 음식은 아삭아삭 씹지 못하면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다”며 “이제야 김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헤, 오가이, 텐. 이들 할머니의 원래 성씨는 허(許), 오(吳), 전(全)씨다. 강제 이주 후 소련인들의 발음을 따 성을 새로 얻었다. 오가이 할머니는 “오가(家)라고 말하니 성이 오가이가 됐다”고 했다. 이주 후 현지의 척박한 땅과 혹독한 날씨 때문에 많은 가족을 잃었다. 우즈베크에는 현재 고려인 17만5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병원에서 30㎞ 정도 떨어진 시온고 마을에는 홀로 된 고려인 1세대를 위해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아리랑 요양원’이 있다. 김나영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부원장은 “떠나고 싶어도 몸이 병들고 늙어 떠날 수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무료 틀니 지원을 받은 노인들은 모두 이곳 출신이다. 이들이 한 달 연금보다 비싼 틀니를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봉사단장 권호범(46) 치과보철과 교수는 “무료 틀니 지원을 받는 고려인들은 치아가 한두 개만 남아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고령일수록 음식물을 제대로 씹어서 섭취하지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고 말했다.



 서울대치과병원은 우즈베크에서 무료 틀니 지원사업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카모브 미르아브잘 타슈켄트 의과대학병원 부원장은 “우즈베크 의료인들이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을 배우고 익힐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타슈켄트=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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