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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교황이 남긴 것

중앙일보 2014.08.18 01:02 종합 31면 지면보기
패티김의 명품가요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을 (불경스럽게도) ‘가방을 남기고 떠난 사람’으로 바꿔 부른 적이 있다. 필름을 돌려보자. “누가 남을래?” 체육시간이었다. 모교는 축구의 명문. 아이들이 축구하러 운동장에 나갈 땐 누가 남아서 가방과 옷을 지켜야 했다. 아이들은 주번 대신 나를 쳐다보았다. 이심전심. 나도 받아들였다. 내가 한쪽 편에 들어가면 승패가 예측되는 상황. 한마디로 저질체력이었다. 홀로 남겨진 나는 낙서하거나 시를 쓰고 그걸 노래로 만들었다. 가끔은 주전자에 물을 채워 날랐다. 친구들은 친절한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터득한 평화의 길이었다.



 가방을 지키던 소년은 나중에 무슨 선물을 받았을까. 거울 속으로 동안 피부(물론 상대적이다)와 온순한 표정이 보인다. 자외선 아래서 씩씩하게 달리던 소년들은? (그것 보라지) 지친 관절과 굵은 나이테가 남았다. 세월이 주는 즐거움의 총량은 공평하다.



 소탈하기로 유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때 축구광이었단다. 그분이 내 추억 속의 책가방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가져온 가방을 열어 청년들에게 속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선물과 과제물이 함께 들어 있다. 선물이 ‘희망’이라면 과제는 ‘화해’다. “미운 짓 하는데 어찌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인가.” 내 나름의 해석은 이렇다. 미운 자를 미워하지 말고 미움을 미워하라. 악을 써서 악을 이길 순 없다. 화를 증폭시킨 자들은 화난 사람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하라. 외우기 쉽게 요점을 정리하자. 1. 반발보다는 반성이 먼저다. 2. 화를 푸는 과정은 대화다. 3. 대화의 목표는 평화다. 멀지만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남기고 햇빛은 주름을 남긴다. 자식들에게 빚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에게 빛을 남기고 떠난 각막기증자도 있다(김수환 추기경도 그랬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 희망을 선물로 받았으니 답례로 소망을 낭송하자.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김현승 ‘가을의 기도’ 중에서) 삶을 비옥하게 만드는 건 대형 방탄차가 아니다. 오직 ‘두려움 없는 사랑’이다. 희망에게 총 쏘는 자에겐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박남수 ‘새’ 중에서)가 던져질 뿐이다.



 과제물도 제출하자. 머리로 풀지 말고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 “대결을 통해 손보지 않겠습니다. 대화를 통해 손잡겠습니다.” 언행이 일치한다면 교황청에서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답신을 보내오지 않을까.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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