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한부 인생 소년과 소녀 두려움 없는 사랑의 세계로

중앙선데이 2014.08.16 01:29 388호 24면 지면보기
이 영화의 원제는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The Fault in Our Stars)’다. 미국 작가 존 그린이 2012년 발표한 같은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번역투가 다소 걸리긴 하지만 ‘안녕, 헤이즐’로 굳이 바꾼 이유가 궁금하리만큼 이 흡인력 있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시저 암살 음모를 주도한 캐시어스는 브루투스를 끌어들이면서 “친애하는 브루투스여, 잘못은 우리 운명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네”라고 말한다. 캐시어스의 말을 넓게 해석하자면 개개인에게 닥치는 행운과 불운은 결국 본인이 과거에 내린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새 영화 ‘안녕, 헤이즐’

과연 그럴까. 원작자 존 그린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들리는 캐시어스의 말이 정작 불운을 맞은 당사자들에겐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별에, 우리의 잘못된 운명에 있는 거라고. 이 세상은 온갖 불합리함과 불공평함으로 가득 차 있고 불운 역시 공평하지 않게 분배된다고.

‘안녕, 헤이즐’의 두 주인공은 그런 불운의 본보기 같은 경우다. 16세 소녀 헤이즐(셰일린 우들리)은 어렸을 때 앓은 갑상샘암이 폐로 전이되면서 산소통을 바퀴 달린 여행가방처럼 끌고 다니며 호흡기에 의존하는 신세다. 헤이즐의 엄마는 매일 같은 책만 읽고 친구도 사귀지 않는 딸이 우울증에 걸릴까 걱정이다. 그러던 헤이즐이 암환자 모임에 마지못해 나가게 되면서 골수암으로 한 쪽 다리를 잘라낸 18세 소년 거스(안셀 엘고트)를 만난다. 거스의 ‘살인 미소’와 범상치 않은 유머 감각에 반한 헤이즐. 이들은 헤이즐이 닳고 닳아빠질 때까지 읽은 소설『거대한 아픔』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사랑에 빠진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지닌 10대 소년 소녀의 러브 스토리이니, 신파로 흐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는 방법이 하나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데서 ‘안녕, 헤이즐’은 수많은 ‘크리넥스 무비’들과는 확연히 선을 긋는다. 경쾌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은 유머를 부비트랩처럼 장치해놓은 전반부는 점차 진행될수록 죽음과 불멸의 의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 등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간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공포 때문인데, 거스도 다르지 않다. 헤이즐의 폐에 물이 다시 차 입원하는 소동이 벌어진 후 거스는 극복한 줄 알았던 다리의 암세포가 온몸에 퍼진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헤이즐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지 못한다. “고통은 느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살 빼는데 다리를 잘라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넉살을 떨던 의연한 소년에게도 “문장이 중간에 끊긴 것처럼 그냥 끝나버리는” 죽음은 결코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불멸』의 표현을 빌자면 불멸이란 결국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영화의 목소리를 빌자면 그건 사랑의 기억을 남기는 것뿐이다. 헤이즐은 이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 “모두에게 기억돼야 특별한 건 아냐. 내가 널 사랑하고 내가 널 영원히 기억할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행복해져.”

세상 누구보다도 ‘지금, 여기’의 사랑이 중요한 이들이 『거대한 아픔』의 작가 피터 반 하우튼(윌렘 대포)의 초청을 받아 떠나는 암스테르담 추억 여행은 그래서 특별하다. 안네 프랭크 생가를 방문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희망이 있는 곳에 삶이 있어요”라는 유대인 소녀의 육성과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헤이즐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은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그리고 둘이 나누는 깊은 키스와 지켜보던 관광객들의 박수. 여기에 헤이즐의 대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모두 잊혀지고 한 줌 재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지금 널 사랑해.” 이 불공평하고 미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듣고 싶은 종국의 한 마디다.

로맨틱 코미디의 ‘발견’으로 불렸던 ‘500일의 썸머’(2010년) 작가들이 각색을 맡아 흐르는 눈물 사이 사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대사들을 준비해놨다. 주인공 커플의 화학작용으로만 따지면 ‘500일의 썸머’를 능가한다. 제작비 1200만 달러의 10배가 넘는 수입(8월 8일까지 1억2300만 달러)을 거둬들인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영화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