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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정약종 발자취를 찾아

중앙일보 2014.08.16 01:30 종합 12면 지면보기
1780년대 천주교를 이끌었던 신자들이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정약전·정약종·정약용·윤지충 등 10여 명의 신자가 둘러 앉은 가운데 이벽이 강론을 하고 있다. 1984년 화가 김태가 그린 그림으로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섬 추자도. 조선시대 천주교를 믿다가 왕조의 전복을 꿈꾼 황사영(1775~1801)의 8대 손인 황경자(74) 할머니가 섬을 지키고 있었다.

"군사 보내 천주교 박해 막아달라" 밀서에 시대 아픔이 …
황사영, 주문모 신부 참수에 격분
정약종, 평민 위해 한글 교리서 내



 “우리 가문에 별반 특징은 없습니다. 잘된 사람도 없고, 특별한 머시기도 없습니다. 잘 배우지도 못하고. 천주교에 다니고 있어 (선조에 대해) 대강 아는 것이제.”



 할머니의 본관은 창원(昌原). ‘5대에 걸쳐 천재가 한 번씩 나온다’는 집안이다. 황사영은 16세 때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정조가 직접 그의 손목을 잡고 칭찬하면서 등용까지 약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을 청나라에 편입시키고 서양 군대를 이 땅에 요청하는 그의 비밀문서가 발각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된다. 황사영은 사형을, 부인 정명련(1773~1838)은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다. 정명련은 제주도로 가던 중 두 살배기 아들을 추자도에 사는 어부 오씨에게 맡긴다. 이때부터 추자도에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황사영 아들의 후손이 대대손손 이어지면서 황경자 할머니까지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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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이 정5품 벼슬까지 지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황사영은 왜 천주교를 믿어 국가 전복을 음모했을까. 황사영이 태어난 17세기 후반은 성리학의 지배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였다. 정조도 최초로 벽돌과 거중기를 사용해 수원화성을 건축할 정도로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실용학문인 수학과 과학기술을 중국에서 배워 오던 시절에는 유럽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청나라 황실에 머물며 자문 역할을 했다. 수학과 천문학에 능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지은 교리서 『천주실의』도 조선에 들어오면서 ‘천주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황사영 연구집을 낸 여진천 신부는 “선교사 없이 자발적인 학문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게 한국 천주교 역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황사영은 처숙(妻叔)인 정약종(1760~1801·정약용의 셋째 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천주교 교리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비밀문서를 작성했다던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는 서울에서 약 2시간30분 걸린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탄 뒤 2시간 후 제천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20분 정도 택시를 타고 시 외곽에 있는 성지에 다다랐다. 배론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을 닮아 舟論(주론)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1801년 2월(음력) 황사영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서울 곳곳으로 피신하다 배론으로 거처를 옮긴다. 배론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여러 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옹기그릇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주민들은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 지하실을 만들고 그 위를 큰 옹기그릇으로 덮었다.



교황청이 소장한 황사영 백서 원본 일부. 10월 31일까지 관련 유물들과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황사영은 밀사를 보내 바깥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해 8월,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조선의 유일한 사제였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4월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수됐다는 것이다. 황사영은 1795년 주 신부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었다.



 그는 격분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과 원인, 해결책을 담은 비밀문서 ‘백서’를 작성했다. 어둑한 토굴 속에서 그는 등잔불에 의지한 채 가는 붓글씨로 길이 62㎝, 너비 38㎝의 명주(明紬)에다 1만3384자를 써 내려갔다. 명주에다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비단 편지)로 불린다. 저고리 뒤쪽 깊숙한 곳에 이 비단을 꿰매어 감춘 뒤 청나라에 있는 프랑스인 알렉상드르 드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해 9월 밀사가 체포됐고, 황사영도 백서와 함께 땅굴 속에서 잡혔다.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만~6만 명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싣고 해안가에 와 국왕에게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부가 청나라 신부를 사형시키고, 그를 ‘조선사람’으로 은폐하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적어 놨다. 조정은 황사영에게 대역죄를 선고하고 11월 능지처참에 처한다.



 한국 천주교는 황사영에게 거룩한 삶을 살거나 순교한 이를 가리키는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쓸 수 있도록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이번 시복식 대상 124명에는 빠졌다. 천주교 관계자는 “시복 절차는 재판 과정과도 같아 일반 사회에서도 논란이 있으면 안 된다”며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를 언급한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가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져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는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다. ‘2014년 8월의 황사영’도 있다. 좌우가 극명하게 갈리는 한국 사회에선 요즘 자기 쪽에만 유리한 메시지를 교황에게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황사영이 이번에 시복자로 선정된 정약종을 도와 조선에서 초기 천주교회를 뿌리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정약종은 양반이 아닌 신자들을 위해 한글로 된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낸 인물이다. 정약종의 후손인 정호영(56·경기도 안양)씨는 “『주교요지』는 인간의 기원이 어디인지 묻는 질문에서 시작한다”며 “인간이 절대자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한글로 알기 쉽게 표기했다”고 말했다.



 다산의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생가 터를 복원해 정약종의 업적을 기리는 천주교 마재성지가 있다. 성지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뒤로한 채 검단산과 용마산을 바라보고 있다. 정약종은 강 건너편 팔당호 근방인 양근에서 본격적인 천주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 시복되는 백정 출신인 황일광과 같은 집에서 지낸다. 데리고 있던 노비들을 무명 한 필 정도의 돈만 받고 풀어 주기도 했다. 그의 후손은 “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천주교 단체의 장을 맡았고, 한글로도 교리서를 낸 만큼 노비들에게도 허물없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전한다. 정약종은 1801년 반대파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 서소문에서 처형당한다. 황사영 백서는 “그가 처형장에서 큰소리로 ‘당신네는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라고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른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이렇게 100여 명의 신자가 처형당했다. 이번에 시복이 결정된 124명 중 신유박해 때 처형을 당한 순교자는 53명(42.7%)으로 다른 박해에 비해 가장 비중이 높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인 조광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사람을 사랑하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교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책에 있는 그대로 실천했다”며 “‘양반도 상놈도 다 똑같다’며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 신자들을 보고 정부는 탄압 수위를 더욱 올렸다”고 말했다. 이들이 조선에 천주교를 뿌리내리려는 노력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1795~1839)으로 이어져 조선 천주교 교구 설정(1831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황사영의 묘는 1980년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견됐다. 무덤을 파 보니 석제 십자가와 삭은 비단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발견돼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묘는 잡초가 무성한 채 남겨져 있지만 교황 방한을 맞아 성지 순례를 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12일 이곳을 찾은 서보미(54·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 “박해를 받아 본 지역의 신자들은 천주를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순교자의 묘를 보면서 나태해지는 마음을 다시 잡곤 한다”고 말했다.



제천=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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