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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안창남 비행기 프로펠러

중앙일보 2014.08.15 15:29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한 1인승 비행기 한 대가 남산과 창덕궁 상공을 지나 유유히 날다가 다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기 양쪽 날개에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비행기의 이름은 ‘금강호’. 조종사는 우리나라 최초 민간 조종사 안창남(1900∼1930년)이었다. 이날의 비행을 보기 위해 여의도 백사장에는 5만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구경꾼들을 위해 하루 4차례 임시 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3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대중의 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이후로 사람들 사이에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노랫말이 퍼져나갔다.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안창남의 비행기는 6ㆍ25전쟁 때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에 장착돼 있던 목재 프로펠러 4개가 연세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날개 한 개의 길이가 356㎝, 폭은 27㎝다. 연세대 박물관 관계자는 “안창남의 비행기가 기증돼 교내에 전시됐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현재 수장고에 있는 프로펠러가 그 비행기의 일부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35년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상황보고서'에는 ‘비행기(故안창남씨 승용) 1점 기증자 송영기씨’라고 적혀있다. 당시 연세대 축구부 코치, 현정주씨가 기증자 송씨를 학교에 소개했다고 한다. 1940년대에 연세대에 다닌 동문들도 “교내 한 가건물 안에 비행기 한 대가 전시돼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6ㆍ25 때 학교 곳곳이 불타면서 비행기도 함께 소실됐다. 화재로 타고 남은 잔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안창남은 휘문학교 재학시절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키웠다. 1919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와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이듬해 5월 일본 최초의 비행 자격시험에서 수석 합격했고 1922년에는 도쿄와 오사카간 우편대회 비행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비행조종사는 돈과 명예가 보장된 직업이었지만 안창남은 관동대지진 이후 자행된 재일 한국인에 대한 학살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는다.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1926년 여운형(1886~1947년)의 권유로 산시성으로 건너가 항공중장과 비행학교장으로 활동했다. 항일 비행학교 건설을 목표로 대한독립공명단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30년 4월 2일 중국 산시 비행학교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추락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주어졌지만 미혼으로 사망한 그에게 후손이 없어 정부가 훈장을 보관하고 있다. 연세대 박물관 측은 프로펠러의 형태와 새겨진 글씨를 토대로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서준 기자 be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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