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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와인 여행의 ‘악몽’

중앙선데이 2014.08.09 02:08 387호 23면 지면보기
명사 몇 분과 럭셔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양복 입은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개조한 성이나 아주 전통적인 저택에서 자고, 미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환상의 코스였다.

김혁의 와인야담 <19>

그러나 여행의 진짜 재미는 이런 화려함과 풍요보다 예상치못한 배고픔과 모자람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물론 경제적인 여행을 하는동안 한두 번 풍족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프랑스 론 지방, 정확히 샤토네프 듀 파프 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포도밭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성을 개조한 호텔에서 잠을 자고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와인 성을 방문했다. 천연 바위 속에 공간을 만들어 와인을 숙성시켜온 멋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종류의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시음했고 모두 기분이 좋았지만 서서히 배가 고파 왔다.

하지만 점심 약속 때문에 자동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지공다스라는 마을로 가야만했다. 지공다스 와이너리의 오너는 자신들이 늘 즐기는 전통적인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적당히 배가 고픈 우리는 전통 점심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너리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정원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호박 크기의 시골 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젊은 오너는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식사부터 하고 와이너리 구경은 그 다음에 하자”고 했다. 정말 반갑고 고마워서 만세라도 부를 지경이었다.

첫 코스로 내온 것은 토마토 샐러드. 프로방스 태양 볕 아래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에 신선한 올리브유와 레몬 소스를 곁들였다. 오너가 만든 북부 론 지역의 비오니에 화이트 와인과 정말 잘 어울렸다. 문제는 양이 너무 적었다는 것. 우리는 접시에 남겨진 소스를 빵으로 박박 훑어 깨끗이 비우고 메인 요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너가 가져온 것은 이 지방 전통 소시지 달랑 하나였다. 그는 이것을 3㎜정도 두께로 잘라가며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한 바퀴 돌아 다시 차례가 오기까지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들 ‘좀 더 두껍게 잘라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집안에서 울린 전화 벨소리가 우리를 구했다. 오너가 들어가자마자 필자가 총대를 메고 좀더 두껍게 잘라 배분했다.

모두 좋아했지만 문제는 빵이었다. 하나를 다 먹은 우리는 남은 빵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세 종류의 치즈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 빵은 치즈를 위해 남겨 놓아야겠지요?”하자 모두 수긍은 했지만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오너가 돌아왔을 때 이미 소시지는 거의 남지 않았다. 누구도 그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까지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음식 대신 와인을 좀더 많이 마셨다. 더 먹지 못하면 마시기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치즈와 남은 빵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다.

바로 그때, 오너는 프랑스에서는 꼭 후식을 챙긴다며 가져오겠단다. 모두의 입가에 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그렇지 여기서 끝낼 수가 있을까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너가 전통 후식이라며 가져온 것은 모과를 설탕과 와인에 재워 젤리처럼 만든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탈했다. 새끼손가락 크기로 베어주는 양에 더 허탈했다. 다만 맛은 기가 막혔다.

어쨌든 그날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방문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와이너리를 나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요기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김혁 와인 평론가·포도 플라자 관장 www.kimhyu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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