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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엔 분명한 선 긋고 미래에 대한 전향적 언급 필요”

중앙선데이 2014.08.10 00:15 387호 6면 지면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집권 반년이 지나도록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 만큼 경축사에는 전술적으로라도 유화 제스처를 넣어야 한다.”

‘박 대통령 8·15 경축사외교’ 전문가들의 제언

지난해 8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첫 광복절 경축사를 준비하던 청와대 팀에 외교부의 ‘재팬 스쿨’ 관리들과 학계 전문가들은 이런 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 경축사에서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 어렵다”며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 있고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에 대한 언급은 4600자가량의 경축사 가운데 15%가 넘는 700자에 달했다.

8월 15일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한 날인 동시에 48년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고 주권국가로 탄생한 날이다. 또 이날을 계기로 남북이 분단된 점에서 통일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에 따라 역대 대통령들의 광복절 경축사는 자신의 국정 어젠다와 남북 관계에 대한 비전을 우선 언급한 뒤 대일 관계를 덧붙이는 형태가 많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녹색성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 건국’이 취임 첫해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 메시지였다.

이에 비해 박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 국정 어젠다를 특별히 제시하지 않은 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경축사에 많이 언급된 키워드 순위에서 ‘일본’은 ‘평화’ ‘역사’ 등과 함께 수위에 올랐다. 그만큼 박 대통령이 일본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 뒤 양국 관계가 더 악화되면서 박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선 어떤 언급을 할지가 국내외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앙SUNDAY가 일본 전문가들을 연쇄 인터뷰한 결과 이번 경축사에선 과거사 언급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고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한 전향적 제언을 담아야 한다는 제언이 많았다. 박영준 국방대 교수는 “일본은 과거사와 관련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매우 작다”며 “박 대통령은 그동안 과거사와 관련해 (비판적) 입장을 여러 번 밝혀 왔는데 이번 경축사에서도 과거사를 언급하면 역효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도 “지난해 경축사에서 과거사를 언급했으므로 이번엔 동북아 질서라는 큰 틀에서 한·일 관계를 조망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중국은 황사·대기오염, 한국은 세월호 참사 등 저마다의 안전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국제안전망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경축사에 녹여 대일 관계의 물꼬를 트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주장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고위 외교관도 “고노·무라야마 담화 등 한·일이 지난 50년간 과거사와 관련해 쌓아 온 합의를 바꾸지 말라는 원칙적인 언급을 하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향적인 내용을 제안한 이들은 특히 11월 베이징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일본이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한·일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고위급 대화가 열릴 필요가 있으므로 광복절 경축사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와 관련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시각 역시 여전히 강하다.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지낸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원칙적으로 언급해야 할 대목을 생략하면 일본은 ‘한국이 고립을 우려해 유화노선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꽃놀이패를 쥐게 됐다’는 오판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경축사에는 최소한 ‘(일본이) 역사인식을 분명히 해야 신뢰가 생긴다’는 원칙적인 선을 긋는 동시에 ‘일본이 역사를 직시한다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넣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박 대통령이 지난주 발족시킨 통일준비위원회를 경축사에서 소개하면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전제로 ‘남북 통일에 일본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언급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여권 인사는 “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위안부 문제를 강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그런 전망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7월 30일 이례적으로 위안부 할머니 2명을 면담한 뒤 “개탄스러운 인권 침해”라고 비판한 데 이어 나비 필라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지난 6일 일본을 비판하며 공평·포괄·영구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그 같은 국제적 움직임을 소개하며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올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도 “과거사는 정교하게 언급하되 위안부 문제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과 연설기록비서관은 외교부·통일부 등의 의견을 청취한 뒤 경축사 초안 작성을 지난주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광복절 당일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경축사의 핵심 변수”라며 “최종본은 대통령의 연설 직전에야 확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15를 종전기념일로 부르는 일본에선 당일 각료나 자민당 의원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경축사는 과거사 언급 없이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만에 하나 아베 신조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다면 경축사에선 강도 높은 일본 비판이 불가피할 것”이라고도 했다. 아베는 지난해 12월 26일 야스쿠니를 참배했다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산 바 있다. 야스쿠니 외에도 지난 5일 공개된 일본 방위성의 방위백서가 독도를 10년째 ’일본땅’이라고 기술한 점도 경축사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일본이 광복절 직전이나 당일 한국을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의 미래와 관련해 전향적 언급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그럴 경우 2014년이 동북아지역에 상징하는 함의를 경축사에 녹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올해는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 등 동북아와 세계를 뒤흔든 전쟁 3개가 각각 100·110·120주년을 맞는 해다. 박영준 교수는 “이들 전쟁은 한·일과 중·일 갈등의 뿌리인 동시에 심화된 경제의존 속에서 정치적으론 반목하는 ‘동아시아 패러독스’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경축사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동북아의 화해·협력을 위해 한·중·일 정상회의를 제안한다면 역내 주도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한·일 정상회담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점도 경축사에서 짚고 넘어갈 대목으로 꼽힌다. “반세기를 맞이하는 ‘65년 체제’가 최근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 50년간 양국 관계의 성과는 향후 50년간 더욱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측면은 없애 가자는 언급을 해 봄 직하다. 구체적으로 박 대통령이 지난해 제안한 양국 공동 역사교과서 저술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자고 제안하는 방안도 있다.”(윤덕민 원장)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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