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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돈 버는 맛보다 깨닫는 맛 … 공부하는 백수 택한 CEO

중앙선데이 2014.08.10 01:50 387호 24면 지면보기
경영자 출신의 최유미씨가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김미경 대표 집필실에서 공부가 주는 즐거움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50세를 넘으면서 우리는 두 번째 선택 앞에 놓인다.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렵고도 두려운 질문이다. 20대 때처럼 선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골프에 자신의 50대를 맡겨 버린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중간정산 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든 채우려든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오십을 넘긴 나에게도 이건 엄청난 인생의 숙제다. 답을 찾는 중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말하는 뻔한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을까. 노후에도 꿈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4> 나이 오십에 새 길 찾은 최유미씨

그런데 얼마 전, 나는 가장 새겨들을 만한 해답을 찾은 분을 만났다. 카이스트 박사에 전직 IT기업 CEO 출신. 스펙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녀는 알고 보니 인터넷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인터넷이 초창기 ‘아르파넷(ARPAnet)’이라는 미국의 군사 시험네트워크망이던 시절, 그녀는 몇 안 되는 국내 테스트 유저(User) 중의 한 명이었다. 벤처 붐이 일기 전부터 ‘아이캐시’라는 전자화폐를 직접 개발했고 전자상거래 표준을 만들었다. 인터넷 보안 프로토콜과 암호도 그녀의 손을 통해 탄생했다. 급기야 2004년 자신의 회사를 창업해 10여 년 간 튼튼하게 키웠다. 그야말로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의 행로를 걸어온 셈이다. 그런데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회사를 매각한 뒤 자칭 ‘백수’가 된 것이다. 그것도 뒤늦게 공부에 빠져버린 백수. 바로 오늘의 주인공 최유미(51)씨다.

“회사를 10년 가까이 해보니까 내가 미친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으니까. 어떨 때는 월급 줄 돈도 부족해서 은행을 몇 군데나 돌고 들어왔는데 직원들은 내 맘 같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죠. 그 간극 때문인지 그리 행복하진 않았어요. 백수로 지내면서 공부하는 지금이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것 같아요.”

그녀는 일주일의 사나흘을 ‘남산강학원’이라는 공부배움터에서 지낸다. 강좌를 들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럿이 모여 발제하고 토론하는 세미나에 참가한다. 함께 공부하는 이들 중에는 그녀 또래의 주부들을 비롯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열아홉 소년도 있다. 나이도 관심사도 가방끈의 길이도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일까.

“작년에 스피노자를 일 년 동안 공부했고, 올해는 들뢰즈를 읽고 있어요. 파이어벤트라는 문제적 철학자의 책도 재미있게 봤고, 괴델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 전까지는 괴델이 수학의 논리적 한계를 보여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공부해보니 그가 결국 수학을 자유롭게 해줬다는 걸 알게 됐죠.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그녀의 공부는 경계가 없다. 스피노자를 읽었다가 갈릴레오를 읽고, 과학철학을 공부했다가 요즘엔 머리도 식힐 겸 심청전·숙영낭자전 등의 고전소설을 읽는다. 심청전 같은 뻔한 스토리에 뭐가 있을까 싶지만 뒤틀어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단다.

“소설에서 심청이 빠져 죽는 장면을 보면 심청이 끝없이 넋두리를 하는 모습이 나와요. 오죽하면 뱃사공이 그만 좀 하고 가라고 할 정도였죠. 심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고지순한 효녀가 아니었어요. 무식할 정도로 효를 지켜버리면서 역설적으로 이런 게 정말 효도냐고 물었던 시대의 반항아였죠.”

심청전을 읽으면서 기존의 질서에 반란을 꾀하는 새로운 심청을 만나고,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내 몸이 수조개의 세포와 박테리아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에게 공부는 그런 소중한 ‘만남’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공부할 때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이분법으로 책장을 넘겼다. 돈이 되는 공부, 스펙을 위한 지식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뭐가 되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오히려 ‘지양’한다. 하고 싶은 모든 공부를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그 모든 것들이 엮여 나가면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삶도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최유미 씨는 이를 ‘매혹’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가 왜 좋은 지 말 못하는 것처럼 공부 그 자체가 그저 좋단다. 표정을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스무 살 연애하던 시절처럼, 얼굴이 설레임과 기쁨으로 빛이 난다. 정말 공부가 그렇게나 좋을까.

물론 잘 나가는 CEO에서 하루아침에 공부하는 백수로 적응하는 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남산강학원의 세미나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간 첫 수업에서 그녀는 무참히 깨졌다. 나름 ‘가방끈 길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발제를 이 따위로 해올 거면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곳에 수업료를 낸 ‘고객’인데 스탭들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까지 구겨가며 공부해야 하나.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오기로 버텼다. 그 곳의 다른 이들처럼 그녀도 몸을 써가면서 함께 밥을 짓고 책상을 닦았다. 동시에 공부의 재미에도 점차 눈을 뜨게 됐다. 그러자 그녀의 말마따나 ‘뉴런(신경)의 배선’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소비가 대폭 줄어든 것이다. 늘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니 원피스나 자켓 같은 불편한 옷은 안 입게 된다. 옷을 살 일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중소기업 사장일수록 없어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에 꼬박꼬박 피부 관리도 받았는데 지금은 화장도 안 한다. 친정엄마가 “콩나물 장사같이 새카맣게 탔다”고 할 정도다. 늘 타고 다니던 차도 불편해 요즘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이 그런 생활을 전혀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포만감을 나도 알 것 같다. 나 역시 돈 버는 일 대신, 한 두 시간이라도 공부하면 내 문제를 내가 해석했다는 만족감 덕분에 부자가 된 느낌이 제대로 든다. 바쁘게 돈 벌면서 살다 보면 내 직장·회사·가족 등 남의 문제를 풀어주느라 정작 내 안에 50년간 쌓인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 지난 50년간 내가 왜 이토록 열심히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모르는 채 80세까지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걸 알려면 공부해야 한다. 지식의 습득이 아닌, 내 삶의 문제를 풀어주는 진짜 공부. 그 오래된 숙제를 풀고 있는 사람은 그녀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날 수밖에 없다. 그 빛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몰라봤을 리 없다. 지난해 힙합을 한다고 공부는 뒷전이던 대학생 아들이 친구 녀석들과 함께 찾아왔다.

“엄마, 우린 너무 무식한 거 같아요. 우리도 우리만의 관점을 갖고 싶어요. 공부 좀 시켜주세요.”

고등학생 때는 100만원 짜리 수학 과외를 시켜줘도 공부 안 하던 아들이었다. 왜 공부 안하느냐고 물으면 “열심히 공부한 엄마가 사는 걸 보니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라고 대꾸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은 제 발로 찾아와 함께 니체를 읽고, 글도 쓴다. 덕분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힘들어하던 아이들도 조금씩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공부가 주는 가장 큰 힘은 세상이 던지는 질문 자체를 바꾸게 하는 데 있어요. 세상은 ‘성적 잘 받을래? 아니면 굶을래?’로 묻지만 그 사이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어요. 그 안에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는 힘, 세상의 질문을 거부하고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배짱이야말로 공부만이 가진 힘이죠. 그 힘을 아이들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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