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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탐사] 낙수와 분수 사이

중앙선데이 2014.08.10 02:43 387호 31면 지면보기
한 부자가 세 명의 하인을 불러 재능에 따라 다섯과 둘, 그리고 한 덩이의 금을 주고 외국여행을 떠났다. 다섯 덩이를 받은 하인은 장사 수완을 발휘해 다섯 덩이를 더 벌었다. 두 덩이를 받은 하인도 장사로 두 덩이의 이익을 얻었다. 하나를 받은 하인은 금을 땅에 묻었다. 시간이 흘러 돌아온 주인에게 앞서의 두 하인은 큰 칭찬을 받았다. 마지막 하인이 주인 앞에 섰다. “행여 잃을까 두려워 잘 보관하고 있었나이다.” 이에 주인이 노해 말했다. “이 게으른 놈아. 네가 못하면 전문가에게라도 맡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저 놈의 금덩이를 빼앗아 열 덩이를 가진 하인에게 주어라.”

『마태복음』이 들려주는 얘기다. 그것의 25장 29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여기서 ‘마태 효과’란 말이 나왔다. 하나님한테는 보다 깊은 뜻이 있겠지만 사회학자들은 ‘부익부 빈익빈’을 일컫는 데 쓴다.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마태 효과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밀물은 모든 배를 들어올린다’, 즉 부자들이 돈을 많이 벌어 경제성장이 이뤄지면 가난한 사람들도 그 낙수효과를 얻어 형편이 더 나아지게 된다는 게 우파 경제학자들의 논리였다. 따라서 부자들 세금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 복지비용을 늘리면 경제성장에 해를 끼쳐 결국 없는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간다는 거였다. 좌파 경제학자들 역시 여기에는 크게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경제성장에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효율과 소득 불평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없는 사람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시력 교정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의 안경을 끼고는 도무지 세계경제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새 안경에는 부자들에게 과세를 늘리고 빈자들을 지원하는 게 오히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이 담겼다. 새로운 패션을 유행시킨 이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였다. 그는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최상위 부자들에게 80%의 소득세를 부과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그저 우스개로 치부됐을 주장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크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론』은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우파 매체들한테서 “사 놓고 안 읽는 대표적인 책”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비슷한 보고서를 내놨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며칠 전 국제신용평가회사 스탠타드앤드푸어스(S&P)가 내놓은 거시경제 보고서는 얘기가 달랐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소득 불평등임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기업 또는 투자자들처럼 부자들에게 주로 정보를 제공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좌파 성향의 그룹에서 논의되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파 경제학자들에게는 조금 과장해서, 아군 진영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양심선언’ 같은 것이었다.

S&P 보고서는 “소득 불평등이 지속적 성장에 해를 끼치며 미국은 이제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그런 빈부격차가 2008년 금융위기 후 5년 간의 성장세를 저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향후 10년간 미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5년 전 예상했던 연평균 2.8%에서 2.5%로 낮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급진적 정책(부유세)은 역풍을 불러오겠지만, 소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주의 깊은 접근(교육 투자)은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12년 국내 상위 10%의 소득비중은 45.5%다. 세계최고 수준인 미국(52%)보단 낮지만 프랑스(32.7%)와 일본(40.5%)보다 높다. 상위 10%와 하위 10% 간의 소득격차는 1990년 8.5배에서 올해 12배로 벌어졌다. 독일(6.7배)이나 프랑스(7.2배), 캐나다(8.9배)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 같은 양극화가 소비를 억제해 경기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부인 못할 사실이다.

S&P 보고서에 대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 같은 이는 벌써부터 부유층 세금과 저소득층 복지를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분수효과’를 외치고 있다(Goodbye, trickle-down; hello, trickle-up).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장과 분배 사이 최고의 황금비를 찾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훈범 중앙일보 국제부장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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