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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뮈리엘의 환대의 식탁

중앙일보 2014.08.09 01:02 종합 24면 지면보기
도정일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는 사람들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 하나가 일찌감치 초반 도입부에서부터 등장한다. 뮈리엘 주교가 거지꼴의 장발장에게 성당 문을 열어주고 먹을 것, 마실 것, 쉴 곳을 제공해주는 환대의 식탁 장면이다. “우리도 가난하게 살지만 나눌 것은 있다”고 주교는 말한다. 그는 야밤에 찾아든 그 낯선 인물을 겁 없이 식탁에 앉히고 (그가 혹 도둑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의 특별한 손님’이라 불러준다. 장발장은 자기를 특별손님으로 대접해주는 뮈리엘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놀랄 만도 하다. 그는 출옥 후 그날 그 순간까지 그런 식의 환영을 어디서도 받아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장발장에 대한 뮈리엘의 환대는 세 번에 걸쳐 발생한다. 식탁 장면이 첫 번째 것이라면 두 번째 것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경찰에 잡혀온 장발장을 뮈리엘이 곤경에서 구해주는 장면이다. “아니, 이 은촛대는 왜 안 가져갔지?” 주교는 얼굴이 뻘게진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안겨준다. 장발장에게는 놀라운 환대이자 구원의 순간이다. 세 번째 것은 뮈리엘이 장발장에게 ‘환대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권리가 있다고? 그렇다. “당신은 나의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뮈리엘은 말한다.



 뮈리엘의 환대론, 혹은 권리로서의 환대론은 장발장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 이 21세기 한국인에게도 놀라운 데가 있다. 그 환대론에 대한 현대적 해석학은 이런 식의 주장과 설명법을 채택할 수 있다. 환대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일시적 선심행사가 아니고 우월한 위치의 주인이 약한 위치의 수혜자에게 행하는 비대칭적 자비행도 아니다. 그것은 손님의 권리이고 그 권리에 대한 존중이다. 환대는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주의적 교환의 게임룰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행위도 아니다. 환대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 무조건성은 환대받을 권리의 보편성에서 나온다. 그 권리는 당신의 것, 그의 것, 나의 것이다. 내가 환대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한 나는 당신의 환대권을 인정해야 한다. 환대에 대한 타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순간 내가 환대받을 권리도 부정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건·사고들 앞에서 나라와 사회에 대한 강한 변화의 요청들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몸부림치며’ 바꾸고 고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환대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뼈에 속속들이 새기고 온몸의 기억세포들에 입력시켜 사회에 만연한 ‘인식의 부패’와 ‘의식의 부패’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사람 밑에 사람 있고 돈 밑에 사람 있고 권력 밑에 사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식의 부패다. 그리고 그 부패를 당연지사로 여기는 것이 의식의 부패다. 뮈리엘의 환대윤리가 장발장을 바꿔놓는다면 그 윤리의 한국적 응용기회는 참으로 많다. 군 입대자는 두들겨 패도 되는 제국군대의 졸병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고 대학강사는 멸시해도 될 하급 지식근로자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소중한 교육인력이다. 모든 사회적 약자와 최소수혜자들에게도 이런 환대윤리의 확장이 필요하다.



 근대 민주사회는 전통사회의 규범들을 많이 희생시켰지만 시민이 시민으로서 유지해야 할 예절과 예의까지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상호존중과 예절이 ‘시빌리티(civility)’다. 시민에 대한 시민의 예의에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의’라는 확장된 차원을 얹어주는 것이 ‘환대(hospitality)’다. 시빌리티가 ‘시민들’ 사이의 차이를 존중한다면 환대는 모든 분할과 분리의 체계를 넘어 ‘사람들’ 사이의 공통성을 존중한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그 공통성이다. “우리는 형제”라는 뮈리엘 주교의 말도 결국은 그런 의미의 것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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