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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벗' 최인호가 병중에 추렸다 … 시공 넘어 빛나는 이어령의 글

중앙일보 2014.08.09 00:52 종합 1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읽고 싶은 이어령

이어령 지음, 여백

269쪽, 1만4800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다면체다.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을 외쳤던 문학평론은 시작일 뿐이었다. 소설·시·에세이까지 두루 섭렵하더니 논객까지 겸했다. 한때 트레이드 마크였던 해박한 지식과 냉철한 분석력,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그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 대신 멋이 들었다. 인간을 보는 따뜻한 눈과 삶의 다음까지 넘겨보는 영성까지 보탰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집을 지난해 세상을 떠난 소설가 최인호씨가 생을 마감하기 서너 달 전 찾았다. 야윈 최인호의 손을 멋쩍게 붙잡은 이어령은 까맣게 잊고 있던 글 빚을 떠올렸다. 병중의 최인호는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남은 기운을 모아 이어령의 글을 추리고 추린 32편을 가제본해 들고 온 것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어령은 이 책의 글은 “추억의 글, 위안의 글, 같이 포옹하고 싶은 생명체로서의 글”이라고 했다.



 둘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올라간다. 최인호의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를 고른 심사위원이 바로 이어령이었다. 이어령은 최인호를 ‘글 벗’이라고 부르며 아꼈다. 그런 최인호의 눈으로 고른 글을 통해 이어령의 참모습을 다시금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엄살과 공갈에 얽힌 현대사회의 특질부터 우주의 진리까지 다룬 내용도 다양하다. 크고 작은, 때로는 울퉁불퉁하고 매끈하며, 가끔은 거칠거나 얌전한 글들이 시간과 공간의 벽을 지나 우리의 가슴에 다가온다. 어쩌면 최인호는 이 글모음을 통해 이어령의 원형질을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최인호 방식의 이어령 탐구다.



 여행과 관련한 ‘파리의 우울’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제네바에서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자 모든 것을 승객이 알아서 하도록 돼 있는 공항 시스템에서 그는 고독을 느꼈다. 그는 “공항은 자유의 벌판이다”라며 “합리주의의 궁극에는 늘 그런 인간의 고독이 있는 법”이라고 되뇌었다. 우연히 여권도 보여주지 않고 공항 밖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한결같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불친절에 분노한 그는 “그 자유의 고독을, 타자에게서 고립된 개인의 그 독자적 생의 냉정함을 나는 공항 터미널에서 체험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제네바 공항에서 새로운 절차에 따라 입국절차가 끝났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러자 그는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적었다. “불친절하다는 것도 실은 친절의 개념이 다른 것뿐이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의 친절이다.” 삶의 부조리함을 유쾌하게 꼬집는 글이다. 그의 글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음식물로 본 동서 문화’라는 제목의 글에도 눈길이 멈춘다. 그는 “일본 요리는 눈으로 먹고, 인도 요리는 손으로 먹으며, 프랑스 요리는 혀로, 이탈리아 요리는 배로 먹는다”라는 유머를 소개하며 여러 나라 음식물은 민족성만큼 각기 특색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령의 주특기랄 수 있는 ‘비교문화’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빵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 “밥의 문화는 한솥의 문화”라는 글을 읽노라면 왠지 따뜻한 밥상이 그리워진다. 이어령의 마력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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