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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물러날 때를 알아 화를 면한 범려(范?)

중앙일보 2014.08.08 13:19
어느 해 무더운 여름, 허난성 난양(南陽)에서 중국인 친구에 이끌려 래프팅(漂流)을 하였다. 인제 내린 천, 정선 동강처럼 산수가 수려했다. 난양은 초나라 시절, 완 땅(宛地)이라 불렸다. 이곳은 월 왕 구천(句踐)의 책사이자 군사전략가, 상인의 전설로 널리 알려진 범려(기원전 536~448)의 고향이다.



범려에 관한 고사는 사마천의《사기 월 왕 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 장밍린(張明林) 주편, 《중국명인백전中國名人百傳(연합교육출판사, 2006)》, 이화승이 지은《상인 이야기》, 리정(李政)이 쓴《권력의 숨은 법칙》등에 보인다.



범려는 공자와 비슷한 시기인 춘추시대 말기를 살다 갔다. 중국인은 그를 매우 신비스런 인물로 기억한다. 평민출신으로서 비상한 두뇌와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녔다. 범려와 월 왕 구천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문종(文種)이다.



문종은《사기》등에 보면, 대부 종(大夫 種)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초나라 완 땅의 지방관이었다. 어느 날, 한 마을에 ‘괴팍한 현자’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하를 보내 만나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문종은 호기심이 일어 직접 찾아갔으나 그 괴짜는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다시 몇 차례 더 찾아갔다. 이에 감동하여 ‘광인(狂人)’은 그를 반갑게 영접하였다. 광인은 다름 아닌 범려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았고 이내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둘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다 월나라로 들어가서 월 왕 윤상(允常)을 받들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구천을 섬겼다. 구천은 두 사람을 신임하고 중용하였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헤아려보자. 오 왕 합려가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입은 부상이 악화돼 죽었다. 아들 부차는 섶에 누워(臥薪), 구천을 기억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오 왕 부차가 월나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구천이 선제공격에 나섰다. 시기가 적절치 않다며 범려가 적극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구천은 회계산(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대패하여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범려ㆍ문종의 의견을 받아들여 강화를 모색하였고 강화 사절로 문종을 보냈다. 강화 협상이 여의치 않자, 문종은 기지를 발휘하여 오나라 재상, 간신 백비(伯 를 끌어들였다. 그를 재물과 미녀로 유혹하여 상황을 반전시켰다. 오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강화를 성사시킨 문종의 활약은 눈부시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부디 구천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대가로 월나라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대왕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그의 보물을 모두 불태운 뒤, 나머지 군사와 더불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의 승리 또한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사마천 저, 김진연 김창 편역, 《한 권으로 보는 사기》, 서해문집, 184쪽).”



강화의 조건으로 구천이 인질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이 때 범려가 그를 동행하여 어려움을 같이 하였다. 문종은 사절에서 돌아와 월나라에 머물며 내치에 힘썼다. 두 사람은 구천의 수족과 다를 바 없었다. ‘고굉지신(股肱之臣)’이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3년 동안의 모진 인질 생활을 마치고 구천과 범려는 귀국하였다. 구천은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쓸개를 걸어 놓고 수시로 맛을 봤다(嘗膽).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는 이렇게 생겨났다. 식탁에서 고기를 없애고 몸소 밭을 갈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국토는 기름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하였다. 국력이 강성하여 다시 중원을 넘볼 정도가 되었다. 문종은 구천에게 오나라를 멸할 일곱 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다.



- 오 왕과 권신들에게 값진 보물을 헌상하여 환심을 살 것.

- 오나라의 양식과 각종 물자를 사들여 국고를 텅 비게 할 것.

- 미녀를 바쳐 오 왕을 미혹시킬 것.

- 오 왕에게 장인(匠人)들을 보내 왕궁 건설에 재력을 소모하게 할 것.

- 아첨배들을 오 왕의 모신(謀臣)으로 삼도록 할 것.

- 군신관계를 이간시켜 오 왕이 충신을 죽이도록 할 것.

- 월나라는 재물을 축적하고 군사를 양성해 적절한 시기에 오나라를 공격할 것(리정, 앞의 책, 20쪽).



구천은 즉각 문종의 계책을 받아들여 시행에 옮겼다. 은인자중(隱忍自重), 오래 참으며 때를 기다렸다.



한편, 오 왕 부차는 내치를 소홀히 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는 등 영토 확장에 국력을 소모하였다. 오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구천은 공격을 감행하였다. 장장 6년에 걸친 격전 끝에 오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부차가 투항의 뜻을 전하고 화의를 요청하자, 범려는, 부차를 살려주는 것은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며 단호히 반대하였다. 결국 부차는 자결하고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여세를 몰아 상장군(上將軍) 범려가 군사를 이끌고 회수 북쪽까지 진격하자, 초, 제나라 등 중원의 패권을 노렸던 강자들이 앞 다퉈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구천은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범려의 공명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문종도 일등공신이 됐다.



《사기》에 의하면, 구천이 복수의 마음을 품어 오나라를 격파하고 부차가 자결하기까지 무려 22년이 걸렸다고 한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쥔즈바오처우, 스니엔부완 君子報仇, 十年不 ).’는 말은 이래서 생겨 난 것 같다. 논공행상이 시작됐으나 범려는 진퇴가 분명했다. 그가 구천 앞에서 담대하게 피력한 고별의 변을 들어보자.



“신하된 자는 군주의 걱정을 덜기 위해 힘쓰고, 군주가 수치를 당하면 기꺼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군주께서 오나라에서 갖은 수치를 당했을 때 죽지 않은 것은, 오직 훗날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의무를 다했으니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이화승, 앞의 책, 상인 이야기, 62쪽).”



구천은 범려의 가솔들을 볼모로 붙잡고 겁박하며 만류하였지만, 그는 은밀히 월나라 국경을 넘었다. 범려는 떠나기 전, 문종에게 월나라를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요지는 이렇다.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은 깊숙이 감춰지며, 토끼 사냥을 마치면 사냥개는 주인에게 잡혀 삶아 먹히기 마련이오. 월왕 구천이란 인물은 목이 길고 주둥이가 새 부리처럼 툭 튀어 나왔소.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부귀영화를 함께 누릴 인물이 아니오. 문종, 자네는 어찌하여 떠나지 않는 것이오?(飛鳥 ,良弓藏;狡 死,走狗烹。越王 人 長頸鳥喙,可 共患 ,不可 共樂。子何不去(《사기 월 왕 구천 세가》.”



범려는 철저히 종적을 감춰 구천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제나라, 바로 오늘날 산동 땅에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으로 농업, 목축업, 상업을 일으켜 거부가 되었다. 가난한 자들과 이웃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덕을 베풀며 천수를 누렸다. 범려는 ‘상인의 전설’로 회자되며 중국 상인사(商人史)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문종은 어떠하였는가? 문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 있다가 구천이 내린 검으로 자결하였다. 뛰어난 책사였지만 보신(保身)의 지혜는 부족했다. 애석하게도 물러날 때를 몰라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물러날 때를 몰라 머뭇거리다 비명횡사한 인물은 한 둘이 아니다. 승상 이사(李斯)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 돌아와 아들과 누렁이(黃狗)를 데리고 토끼사냥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잣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허리가 잘려(腰斬) 죽고 말았다. 아! 이 얼마나 비극적인 삶인가.



노자《도덕경》, 제 9장에 보면, “공명을 이룬 뒤에 물러남은 하늘의 도(功成名遂 身退 天之道)”라 하였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이 쓸모없으면 버림받는다. 더 이상 버림받기 전에 알아서 ‘철밥통’의 굴레를 빠져나오는 것은 어떨까. -끝-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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