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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의 시시각각] 손학규와 천국주

중앙일보 2014.08.05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이제 “꿈을… 접습니다”로 바뀌었다. 꼬박 21년 걸렸다.



 정치인생을 하루아침에 이부자리 접듯 할 순 없었을 텐데, 손학규는 21년의 영욕을 7·30 패배 바로 다음날 훌훌 털었다. 고별 기자회견에서 충혈된 눈으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역설적이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손학규의 ‘천국주(天國酒)’가 생각났다. 거물 정치인을 떠나보내며 든 생각치곤 정말 빵점짜리지만….



 두 사람이 마주 서 자기 술은 파트너에게 먹여 주고, 상대방 것을 받아 마시기다(삽화). 내 앞의 술잔을 챙기지 말고, 먹여 주는 데만 신경 써야 술을 흘리지 않는다. 숨은 뜻이 있는 주법이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란 소설을 보면 지옥엔 놀랍게도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다. 하지만 젓가락이 팔 길이보다 길다. 지옥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자기 입에 가져가려고 바둥댄다. 그러다 눈앞의 음식을 두고, 고통 속에 굶는다.



 천당의 음식과 젓가락은 지옥과 똑같다. 그런데 천당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떠 마주 앉은 사람의 입에 넣어 준다. 손학규의 ‘천국주’가 그 이치다. 같은 물자와 환경이라도 행동에 따라 어디는 천국이고 어디는 지옥이듯이 새정치민주연합도 천국에 있을 수 있었다.



안철수와 손학규는 천국주를 들고 마주 선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철수는 한눈을 팔다가 손학규를 ‘경기도의 대구’라는 팔달로 보내며 독배를 권하고 말았다. 만약 “당원과 국민께 7·30 재·보선에 손학규 고문님의 귀환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고 하고, 수원 영통 또는 권선에 공천한 뒤 전력투구했다면 어땠을까.



 손학규는 고별사에서 “손학규가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마는…”이라고 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비전이 허무하게 끝나는 게 왜 대단치 않은 일인가.



 ‘떳떳하게 일하고 당당하게 누리는 세상’. ‘저녁이 있는 삶’의 요체다. 지금의 야당 체질이라면 그들은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를 방전된 배터리 버리듯 할 것이다.



한 시대가 저무네, 손학규를 떠나보내며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됐네, 우리가 ‘저녁이 있는 삶’을 계승하겠네 하는 말장난 따위는 하지 말자. 그 말이 진심이면 왜 진작…. 손학규는 한나라당에선 배신자라고 욕먹고, 떠나는 순간까지 변함없는 애정을 고백한 ‘민주당’에선 ‘정체성’에 맞네 아니네 하는 소리를 어지간히 들었다. 이런 지독한 편견 속에서도 그만큼 젠틀하면서 똥배짱도 있던 사람, 쇼를 하더라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 비틀거리면서도 스케일이 다른 비전을 전진시켜 온 사람, 찾기 쉽지 않다.



 이제 야당의 중원이 텅 비었다. 중도세력이 얼마나 긴 겨울잠에 들지 걱정이다.



 은퇴회견 다음날 아침 손학규와 통화했다.



 - 왜 그런 결정을….



 “손학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기운이 끝났습니다.”



 그는 주어로 ‘나’ 대신 ‘손학규’를 즐겨 쓴다. 자존감의 표출인 듯하다. 그런 그의 성품상 다시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덕담 삼아 말했다.



 - 다시 돌아오셔야지요.



 “구차하게 빌붙는 일 없을 겁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손학규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마지막 랠리의 스톱을 선언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대개는 ‘도행역시(倒行逆施·순리를 거스르는 행동)’ 하는 것과 달랐다.



 정치뿐 아니라 모든 일이 꼭 끝을 봐야만 끝은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룰 목표가 없어서 떠나는 자와 일생의 목표를 앞에 두고 ‘내 역할은 이제 여기까지’라고 여정을 중단하는 사람을 보는 마음은 다르다. 손학규는 회견에서 “능력도 안 되면서 짊어지고 가려 했던 모든 짐들을 이제 내려놓는다”고 했다. 정말 능력이 모자라서일까. 사람 갖고 장난치다 생긴 공천 참사와 새정치연합 선거판 퇴출의 책임을 손학규가 지고 떠난다.



 정치권 ‘자산’이 난세에 ‘유산’이 됐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장 필요한 ‘서민보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건 아이러니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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