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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홍콩과 히코지마

중앙일보 2014.08.04 11:11
얼마 전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갔다가 히코지마(彦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이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 대한 충격이 없었더라면 히코지마는 지금 쯤 홍콩처럼 외국인이 지배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에는 해외 교역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長崎)항 만큼은 개항하여 중국과 서양의 선박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막부는 화란(和蘭 네덜란드)으로 하여금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상관(商館)을 개설토록 하여 매년 일본의 지배자인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의 쇼군(將軍)에게 국제정세를 보고토록 하였다.



화란 상관은 쇼군에게 아편전쟁의 이야기를 상세히 보고하자 막부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가사키에 드나드는 서양 선박은 아편전쟁의 무대인 중국 광동(廣東)에서 일어 난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 온 명치유신(明治維新)은 아편전쟁 충격으로 서양의 기술 수준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학습의 소산(所産)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朝鮮)도 연경사(燕京使)를 통해서 아편전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경사가 만난 사람은 청조(淸朝)의 관리이므로 알고 있더라도 아편전쟁 패배의 치욕을 속국인 조선 관리에게 소상하게 알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연경 즉 북경의 관리들은 수 천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아편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도 없었다.



1854년 일본의 개국(開國) 후 서양 선박은 간몬(關門)해협을 통하여 세토(瀨戶)내해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막부정부가 미국 등 서양제국과 개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이(攘夷)를 고집하는 조슈번(長州藩 지금의 야마쿠치 현)은 1863년 간몬해협에 들어오는 서양 선박을 포격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미국 화란의 4개국 연합군 군함은 간몬해협의 입구를 지키는 시모노세키(下關)를 포격하였다. 이른 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연합국을 대표하여 강화협상에서 배상금과 함께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떠 있는 히코지마의 할양을 요구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홍콩 할양을 생각하고 일본에서도 제2의 홍콩을 만들려고 했다. 11.8 평방km의 히코지마는 80.4 평방km의 홍콩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영국의 대일본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강화협상에서 조슈번을 대표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1839-1867)는 이 섬의 할양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협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이미 아편전쟁 패전으로 중국이 굴욕적으로 홍콩 섬을 할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스기는 일본총리 아베(安倍晉三)의 “진(晉)”자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할 정도로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히코지마를 지켜 낸 다카스기는 조슈번의 수도 하기(萩)에서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젊은 지사들을 교육시킨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영국에 유학을 다녀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당시 다카스기의 영어 통역관 이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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