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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사과하면 책임지라 할까봐" 반성문 떠넘긴 육군 지휘부

중앙일보 2014.08.04 02:42 종합 6면 지면보기
정용수
정치국제부문 기자
토요일인 지난 2일 오후. 국방부 현관이 분주해졌다. 절전을 한다며 평소 꺼 뒀던 불이 켜지고, 국방부와 각 군 의전 담당자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뒤 한민구 국방장관과 백승주 국방차관을 비롯해 육군·공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이 타는 검은색 세단들이 속속 도착했다. 해군에선 해외출장 중인 황기철 해군참모총장을 대신해 엄현성 참모차장이 왔다. 전시 상황도, 북한군의 도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이랬다. 이날 아침 잠에서 깬 한 장관은 공관으로 전달된 조간신문 스크랩을 펼쳤다. 스크랩엔 지난 4월 선임병들의 집단 구타로 사망한 28사단 윤 일병 사건에 대한 비판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한 장관은 전화기를 들었다. 각 군 지휘관들에게 “오후 4시에 회의 좀 합시다”라며 서울로 불렀다. 군대용어로 집합을 건 셈이다. 오후 4시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한 장관은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수치스럽고 안타까운 일로서, 이번 사건을 보는 국민적 시각은 분노와 공분 그 자체”라고 입을 뗐다. 그러면서 “이번 사고의 가해자·방조자·관계자들을 일벌백계하라”고 말했다.



 회의 직후 국방부는 ▶전 군 차원의 병영 내 ‘구타·가혹행위 색출·근절 작전’ 시행 ▶보호관심병사 관리시스템 개선사항 조기 시행 ▶병사 고충신고 및 처리시스템 전면 개선 ▶민·관·군 병영문화 혁신위원회 운영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구타 색출과 근절에 ‘작전’이라는 용어까지 붙인 걸 보면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윤 일병 사망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건 사건이 일어난 지 석 달이란 시간이 흐른 뒤다. 그나마 국가인권위원회나 피해자 가족의 노력이 없었으면 진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가 세간에 파다하다.



 사정이 이런 데도 군은 반성에 인색했다. 2일 회의가 끝난 뒤에도 유족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3일 새누리당의 ‘호출’을 받아 국회에 간 뒤에야 한 장관이 “국민께 죄송하다”고 뒤늦은 사과를 했을 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방부 간부들과 육군 참모총장 측 간에 사과를 둘러싸고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육군 총장이 사과할 경우 자칫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천금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억장이 무너지는데도 군 지휘부는 책임 떠넘기기만 한 셈이다.



 국가인권위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2년 3월까지 접수된 군 인권침해 진정 사건은 405건이다. 닷새에 한 건꼴이다. 그중 폭력이나 가혹행위가 122건으로 30.1%나 된다. 폐쇄적이고 음성적인 군 문화를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어느 부모가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아들이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 중인 한모(48)씨는 “군에 안 가겠다는 애를 억지로 보냈는데 이런 사고가 반복되면 누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느냐”고 말했다. 군 지휘부는 내 자식의 문제란 생각으로 이번 사건을 다뤄야 한다.



정용수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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