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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같은 재료도 그의 손 타면 영적이고 숭고

중앙선데이 2014.08.03 02:17 386호 27면 지면보기
베토벤은 피아노 트리오 7번을 자신의 후원자이자 제자인 루돌프 대공(그림)에게 헌정했다. [Johann Baptist von Lampi]
나지막히 독백하는 듯한 피아노의 다섯 마디 독주로 시작되는 이 곡. 스스로의 청력 상실을 완전히 인정해 버리고 만 후에 쓴 첫번째 협주곡이자 이전의 협주곡 1, 2, 3번에서 보여주는 베토벤 특유의 치열한 에너지나 전투적 성향, 쟁취의 미학이 간데없는 곡. 목가적이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에 끝없는 사색이 깃든, 차별되는 아우라를 지녀 음악 문헌 시간에 ‘가장 베토벤답지 않은 베토벤의 곡’이라고 배우는 이 곡.

음악가만 아는 것들 ② 베토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은 우리 어린 피아니스트들에겐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환상 속의 그대’ 였다. 이 곡을 콩쿠르 결선곡으로 들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고도의 예술성으로 어필하는 피아니스트로 비춰질 정도였으니….

대학교 4학년 쯤으로 기억한다. 나와 몇몇 친구들이 처음 이 협주곡 4번의 악보를 펼쳐본 것이. 아직도 생생한 그 충격을 나만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 지금껏 상상해 온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악보의 생김새에 아연실색했다. 누군가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이렇게 내뱉었다. “이건 완전히 ‘하논’인데?”

어렸을 적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웠던 분이라면 누구나 ‘하논’을 기억할 것이다. 1800년대 프랑스의 피아노 교육자 샤를-루이 하논이 피아노 위에서 양손이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움직임부터 가장 복잡한 움직임까지 단계별로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이 60개의 연습곡은 사실 매우 합리적인 피아노 기술 입문서다. 단, 그 어떤 음악적 내용도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음의 나열이 피아노를 갓 시작한 우리 모두에게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야기했을 뿐. 그런데 부푼 기대 속에 펼쳐본 베토벤의 협주곡 4번 악보 생김새가 이 하논과 꼭 같을 줄이야.

1악장에서 긴 오케스트라의 도입부가 끝나고 피아노가 연주하는 내용은 순 스케일, 반음계 스케일, 아르페지오, 트릴 뿐이다. 이런 것들을 통칭하는 ‘패시지 워크’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우습게도 ‘작품의 주제와 관계없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차적 부분’이라고 나오는데, 이 협주곡 4번에서만큼은 완전히 틀린 설명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적어도 이 곡 1악장은 패시지 워크가 전부니까. 하지만 몇 년 후, 처음으로 협주곡 제5번 ‘황제’ 협주곡의 악보를 펼쳐 거의 흡사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역시 베토벤은, 모두가 쓰던 재료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걸.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지배하던 시대, 기악곡에서 악기가 하던 일은 제법 정해져 있었다. 피아노로 예를 들자면, 제일 대표적인 활용법이 오른손이 멜로디를 노래하고 왼손이 그것을 반주하는 형태다. 이것은 베토벤을 넘어 후대의 슈베르트나 쇼팽에게까지 이어지고 심지어는 현재의 이지리스닝 계열의 피아노 연주법에도 근간이 되는 아주 확고한 ‘주재료’였다 (이루마나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들을 떠올려 보면 쉽겠다). 패시지 워크 역시 사전에 나오는대로 대부분 발전부에서 음악을 화려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베토벤은 여기에 안주하지 못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보자. 피아노가 시작하자마자 하논에나 나오는 스케일로 소리를 지른다. 도레미파솔라시도! 5번 ‘황제’도 다를 게 없다. 오케스트라가 첫 소리를 내자마자 똑같은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내달린다. 하논 연습곡 41번의 E플랫 아르페지오 스케일과 다를 바가 없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가 아예 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흡사 빨간색 물감으로 그리던 그림을 피로 그린 것과 같지 않은가.

이런 베토벤의 ‘재료 혁명’은 실상 스스로의 기교 과시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처음 비엔나로 건너온 청년 음악가의 이름을 제일 먼저 날려준 건 그의 피아노 실력이었다. 훗날 제자 체르니가 ‘그의 온몸을 내던지는 연주에 눈물을 흘리며 깊은 감명에 빠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회상한 피아니스트 베토벤. 혹자의 표현대로 악마의 출현과도 같았다. 그런 그가 고작해야 음악회에서 즉흥 연주 실력을 뽐내는 정도에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대놓고 슈타이벨트, 뵐플 등 동료 피아니스트들과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결 자리를 주선해 내기를 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베토벤에게는 자신의 음악성과 기교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신개념의 곡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피아노 소나타 2, 3, 4번은 스케일, 아르페지오, 트릴, 더블 옥타브, 3/4도 동시 진행, 연타 등 어려운 기교들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마치 골격이 겉으로 드러나는 투명한 건축물들처럼 재료들이 서슬 퍼렇게 비치던 베토벤 작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이 변한다. 피아노 협주곡 제4번과 제5번 뿐만 아니라 교향곡 제5번 ‘운명’, 제6번 ‘전원’,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 사중주 제10번, 제11번, 피아노 트리오 제7번 ‘대공’ 등은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그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 정신적이다. 숭고하다. 영적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살펴본다. 신과 인간의 대화와도 같은 ‘대공’ 트리오의 3악장, 피아노가 먼저 시작한 주제를 바이올린과 첼로가 함께 부르고 나면 피아노가 이내 셋잇단음표 아르페지오를 시작한다. 그 다음은 첼로와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 그 다음은 셋이서 함께 아르페지오, 그 다음은 셋잇단음표 연타 패시지워크, 그리고는 다시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이럴 수가. 날것의 재료들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자갈들로 만든 석상이 순금상보다도 더 빛나는 게 가능할까. 베토벤의 음악이 바로 그렇다.



스케일: ‘도레미파솔라시도’처럼 한 조성 안의 음계를 순서대로 치는 것

반음계 스케일: ‘도도샵레레샵미파솔솔샵라라샵시도’처럼 모든 음계를 순서대로 치는 것

아르페지오: 한 화음 안에 있는 음들, 즉, 다장조 으뜸화음이라면 도미솔을 펼쳐서 도미솔도미솔도미솔 하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치는 것

트릴: 나란히 붙은 두 음, 이를 테면 도와 레를 빨리 도레도레도레 하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치는 것


손열음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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