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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미워도 들어는 보자

중앙선데이 2014.08.03 02:48 386호 31면 지면보기
며칠 전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가 신이 난 모습으로 말을 붙여 왔다. 2학기 때 함께 앉고 싶은 ‘짝꿍’의 이름을 적어내는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단다. 기특한 마음에 비결을 물었다. 대답은 의외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 많고 대장만 하려는 친구는 인기가 없다”고 했다. 리더십이 있어 보이려고 웅변학원까지 다녔던 아빠 세대와는 확실히 달라진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청(傾聽)은 여러 모로 유용하다. 정책 발굴에도 도움을 준다. 서울시가 최근 개인택시를 기존 3부제에서 4부제로 전환한 것도 ‘주말에 규칙적으로 쉬고 싶다’는 개인택시 기사들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은 결과다. 기존 3부제는 휴일이 들쑥날쑥해 주말에 종교·동호회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정책 수요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 덕에 호응도 뜨겁다. 서울시는 이 정책이 개인택시 기사들의 서비스 수준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요새 목소리를 죽이고 있는 정책 수요자들도 있다. 재계가 그렇다. 이들은 규제대상으로만 여겨질 뿐 다른 국민처럼 행정 서비스를 제공받는 정책 수요자란 인식은 드물다.

요즘 재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사내유보금 과세를 둘러싼 것이다. 롯데그룹이 서울 잠실에 짓고 있는 ‘롯데월드타워(제2롯데월드)’ 개장 여부도 빠지지 않는다.

대기업 투자를 유도해 경기를 살리자는 데 반대할 이는 드물다. 아쉬운 점은 ‘정책을 내놓기 전에 기업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어봤나’하는 것이다. 투자를 촉진하고자 한다면 여건을 만들어줄 일이다. 2003년 미국 앨라배마주(州) 정부는 현대차 공장 유치를 위해 총 3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전담 공무원을 붙여 최대한 빨리 공장이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린 어떤가. 총 공사비 3조5000억원이 들어가는 롯데월드타워의 경우 상업시설 공사를 마쳤지만 언제 문을 열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여기엔 1000여 개의 입점업체가 들어서 있고, 이 중 70%는 중소기업들이다.

‘무작정 기업 편의만 봐주자’는 건 옛날 얘기다. 요즘 반(反) 기업정서에는 과거 기업들이 부당하게 누린 특권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하지만 “꼭 풀어달라”고 읍소하는 정책 수요까지 외면해선 안 된다. 공장 등의 수도권 입지규제가 대표적이다. 익명을 원한 재계 인사는 “기존 규제를 없애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없던 규제가 불쑥 생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 그는 “경영이란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여론을 이유로 이랬다저랬다 하면 어떻게 돈을 풀 수 있겠냐”고도 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알버트 허쉬만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 Voice and Loyalty)』에서 “이익을 보장받지 못하는 공동체 구성원은 결국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고 했다. 대기업들이 얄미울 때도 많다. 하지만 떠나게 내버려 둘 때는 아니지 않나.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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