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계엄사 발표 김대중씨 중간수사 내용

중앙일보 1980.05.22 00:00 종합 3면 지면보기
1, 김대중의 의도와 목적

10·26사태의 발생을 자신의 정권획득의 호기로 인식한 김대중은 79년12월23일 연금해제조치 이전부터 사실상 정치참여의 주역을 자처, 시국수습에 대한 제의를 비롯한 추종세력 규합에 착수하면서 교묘한 인기전술로 국내외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케하는데, 주력하였으며, 2윌29일 복권조치후에는 표면상 신민당에의 복귀를 통한 정권획득 기반의 구축과 내면적으로는 사조직 확장을 통한 지지세력 규합에 현안이 되는 등 합법·비합법 투쟁의 양면전략 포석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에 편승한 정권획득기반 구축시도는 당권과에 의한 완강한 저항과 자기 지지세력기반의 열세, 그리고 대의명분상의 약점 등으로 소기의 목적달성이 어려움을 깨닫고 주지된 바와 같이 신민당 입당거부와 비난공세 등 표리부동한 사이비 정치인의 행태를 노정하였던 것이며, 신민당 편승기도와 별도로 추진해 오던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당동지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등 사조직의 강화, 확대와 국민연합이라는 재야세력을 그 본래 목적과 다른 자신의 집권세력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정치적 포석은 정상적 정당활동이나 합법적 계기를 통해서는 정권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풍조를 심화시키고 국민에 대한 선동을 통해 변CLR적인 혁명사태를 불러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추종세력과 사조직을 이 목표달성에 총투입하는 전술에 몰두한 것이다.

김대중은 대중선동→민중봉기→정부전복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사조직에 편입하여 각 대학과의 연계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들 사조직 추종분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김대중 초상을 음각한 신표(메달)와 「볼펜」을 나누어주는 동시에 학원소요사태를 민중봉기에로 유도 발전시킬 것을 기도한 것이며, 표면상으로는 국민과 학생·근로자들의 자제와 자숙을 강조하면서 이면적으로는 소위「민주화추진 전국민운동」을 내세워 학원사태를 배후 조종하였는바,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해 학생시위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산하에 정책연구실(실장 이문영), 한국정치문화연구소(소장 김상현), 민주헌정동지회(회장 김종완), 민주연합동지회 (회장 김홍일·김대중 장남) 등 각 조직을 구성, 각계 추종분자와 각 대학의 학생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학원세력을 강화하였으며 ▲학생회장 입후보자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하고 각 대학학생회 간부들에게 시위 소요대금을 은밀리에 지급해 주었고 ▲학생시위 현장을 사조직을 통하여 확인하거나 학생들과 수시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학생들을 격려하였으며 ▲4월16일에는 한국신학대학, 4윌18일에 동국대학 둥 대학의 학술강연회를 자신의 선동장화한 것 등을 볼 수 있다.

2,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범죄사실

가,민주화촉진 국민선언을 통한 5월22일 일제봉기획책

김대중은 민주헌정동지회,한국정치문화연구소,민주연합청년동지회 및 기타 사조직 등의 배후 조종을 통한 전국적 학원소요가 비록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 나름대로 조직동원에 성공하였다고 판단되어

앞으로의 학생가두시위를 대규모 반정부민중시위로 유도하여 사회혼란의 결정적 계기를 조성코자 80년5월13일에 있었던 한완상 부친상사 등을 포함, 전후6차에 긍하여 소위 국민연합중앙위원인 예춘호 문익환 이문영 서남동 고은 한승헌 및 복학생대표인 조계자(서울) 심재곤 (서울대) 장기표 (서울대) 등 과희동 ▲계엄해제 ▲언론자유보장 ▲특정인 퇴진 등 5개항의 요구사항과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는 의사는 검은 「리번」을 가슴에 단다는 등 3개 행동강령 및 5월22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은 장충공원 ▲지방은 시청앞 광장에서『민주화 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일재봉기를 획책하였다.

한편 이들의 조종과 사주로 고무된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전국 70개대학 학생대표들을 소집, 5월16일 18시∼17일 18시사이 이화여대에서 회합을 가졌다.

배후조종을 받고 있던 일부 학생들은 일정과 방법에 대한 다수학생 대표들의 이견을 묵살하고 의의를 주도하면서

▲신 총리는 5월20일까지 퇴진할 것과 ▲비상계엄은 5월22일까지 해제하고 ▲연내로 정권을 이양하는 정치일정을 밝히라고 결의하고 관철되지 않을시는 모종행동을 하겠다는 최후통고로 정부에 협박까지 한바 있다.

선량한 많은 학생들에게 정권야욕을 숨기고 이른 바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선동 소요화시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고 집권을 하겠다는 가장 비민주적인 방법을 감행코자 한 것이다.

나,민주연합청년동지회

김대중은 80년3윌 중순쯤 장남인 김홍일(32)조직비서 송창달(39)과 개인비서격인 권혁충(3O)에게 자가에서 민주회복과 본인의 집권지원을 위한 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봉기조직을 결성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송창달·배기선 등은 16명의 준비 및 운영위원을 구성하여 서울 종로구 적선동174에 80년3월말쯤 대중기업이라는 간판을 걸고 비밀점조직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주로 민청학연사건 관련자와 복학생·전현직 학생회간부를 중점 포섭하였고, 중앙조직을 비롯하여 지방조직도 구성하였는 바, 경기담당에 문희상 부산담당에 최정진 등 각 도별로 선정하여 4백여명으로 구성하였다.

이들의 각 대학 조직은 투쟁경력이 있는 복학생에 중점을 두었는바, 서울대는 채만수, 국민대는 배기선, 중앙대는 김기선, 서강대는 김택춘 등으로 구성하여 각 대학의 동점과 대학의 시위구호·방법 등을 총책인 김홍일을 통하여 김대중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왔다.

한편 이들은 5·10∼5·11 2일간 의정부소재 왕류폭포에서 간부 60여명이 회동, 연수회를갖고 김대중의 집권지원을 다시 결의하였으며

5·15∼5·16 양일간의 서울시가시위도 전시복학생 중심으로 동조직을 통하여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밝혀졌으며 사무실수색시 추천서·입회원서 및 비밀숫자로 표기된 회원명부가 압수되었는 바 전체윤곽은 곧 밝혀질 것이다.

다,각 대학별 배후조종지원 선동사례

서울대

80년3월초경 서울대 졸업생 심재권의 안내로 김대중가를 방문한 심재철(서울대영4)로부터 동인이 동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였다는 사실과 앞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한 학생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설명을 듣고 분투할 것을 당부, 격려하면서 자금 1백만원을 제공하였으며 등 심재철은 동 자금을 활용하여 3월28일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학생지도부를 장악하여 5월13일~5월15일간 동 대학생 3천명~5천여명을 동원, 비상계엄철폐 등을 요구하는 시가행진 「데모」를 주동하였다.

고대

80년3월초경 고대복학생 박계동의 안내로 자가를 방문한 동대「서클」연합회장 박일남(법3)에게 장남 김홍일을 통하여 학원민주화 운동을 전개토록 선동하면서 자금45만원을 제공하였으며 동 박일남은 동대총학생회장 신계륜을 조종하여 5월14∼5윌15일 양일간에 동교생 7천여명을 동원 계엄철폐요구 등의 시위와 가두진출「데모」를 전개하였다.

부산대

80년5월경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지부책 노경규의 안내로 상경, 자가를 방문한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정외3)으로부터 동인이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동인에게 총학생회장에 꼭 당선하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라고 격려하면서 자금 34만원을 제공하였다.

경상대>

80년5월10일 진주거주 김대중 사조직(민주헌정동지회 진주조직책) 김룡하는 경상대 김문규(낙농3)에게 김대중 선전책자「민족혼」및 김재규 최후진술 동 상고이유 보충서 등을 제공하면서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선동함으로써 동 김문규는 5월12일 동대생 7백여명을 동원, 가두시위를 감행하여 진주시 시청앞까지 진출, 동「데모」를 저지하는 경찰관에게 투석, 3명의 부상자를 발생케하였다.

3,금대중의 사상배경

김대중은 해방직후 좌익계열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후에 인민위원회로 개칭)선전원으로 가입활동한 바 있으며, 46년말 남로당전신인 구신민당 목포시 당조직부장으로 입당, 활동중 목포시 경찰지서 습격방화사건에 연누되어 당국에 피포, 20일간 구속조사를 받은바 있는데 당시 장인 차보륜의 구명운동으로 구출되었고 49년 보도연맹에 가입,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72년10월 유신 선포후에는 귀국을 포기하고 미일 등지 5차에 걸쳐 내왕하면서 해외거주 친북 반정부교포들을 조직화하여 소위 해외망명정부 수립과 용공세력을 토대로 한 지원세력 확대활동을 전개하였는바 그 실례로 ▲재미교포 중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괴동조자인 이량팔 노광욱 임창영 설병철 등과 망명의회적 성격의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73년7월6일) 김대중이 준비위원장에 취임하였고

▲재일교포중에서는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민단을 파괴하고 교포신문 발간을 통해 북괴의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북괴를 수차 내왕한바 있는 배속호·정재준 등 소위 민단「베트콩」파들과 결탁, 조총련과 합동으로 한민통준비위를 결성, 73년8월13일 일본본부의장에 추대된 바 있다.

동 한민통은 78년6월13일 대법원에서 문첩금 정사사건과 관련, 반국가단체로 판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인 김종충 등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면서 동 회의의장직을 80년3윌24일까지 계속 고수하는 등 뚜렷한 용공행위를 해 왔다.

특히 김대중은 해외체류 기간중 북괴주장에 동조인합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배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73년3월23일 동경외신구약부회견 등)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데 비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드 빵이 보장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73년2월23일 내외 「타임즈」및 NYT기자회견 등)

▲나는 통일하면 결코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요,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북에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73년3월21일 일본상량입관법연수회 강연 등)

▲내가 집권하면 남북연방제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항의해야 한다. (73년5월18일 상항 국제학생회관 강연 등)

▲북한의 WHO·IPU 가입은 환영해야 할 일이다. 남북공동성명이후 사실과 이념을 초월해서 공존해 나가자는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막을 필요가 무엇인가? (73년5월10일 미반한교포지 「자유공화국영」과의 회견 등) 등등 그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