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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위원회, 수사권 없었으면 아무 일도 못했을 것”

중앙선데이 2014.07.26 23:40 385호 4면 지면보기
세월호 참사와 미국의 9·11 테러는 사건의 규모와 정부의 무능을 총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9·11 진상조사’ 뒷얘기 폭로한 전 NYT 기자 필립 시넌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 진상조사위원회(9·11위원회)’가 2004년 펴낸 공식보고서를 보면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도 TV를 보고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고, 사건 발생 직후 정보·인명구조 등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데도 정치적으로 진통이 있었다. 9·11위원회는 유족의 강력한 요청과 민주·공화 양당 합의로 테러 발생 1년 뒤인 2002년 출범했다.

특히 미국에서도 최근 세월호특별법 제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수사권 논란이 첨예했다. 중앙SUNDAY는 9·11위원회를 취재하고 위원회 운영의 뒷얘기를 2008년 책(『9·11위원회:9·11 진상조사의 검열되지 않은 이야기』)으로 펴낸 필립 시넌(사진) 전 뉴욕타임스 기자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시넌 기자의 책은 9·11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았던 필립 젤리코 버지니아대 교수가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와 긴밀한 관계였고, 위원회가 국가안보국(NSA)에 있는 9·11 관련 자료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 결정적인 단서를 놓쳤다는 점 등을 폭로해 미국 사회에 파장을 몰고 왔다. 시넌 기자는 인터뷰에서 “9·11위원회는 강제수사권(subpoena power)을 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했지만 수사권이 없었다면 그나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정당을 불문하고 9·11 위원 10명 모두 수사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주요 문답.

-미국에선 수사권과 관련해 어떤 논란이 있었나.
“수사권 이전에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은 위원회 설치 자체를 반대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앞두고 국론 통일 등을 내세웠다. 공화당 의원들은 상·하원 합동 정보특위를 만들어 9·11 당시 첩보 실패 등을 조사하겠다고 했으나 유족이 독립적인 위원회 설치를 끈질기게 요구해 결국 민주·공화 양당 추천 위원 10명으로 구성된 9·11위원회가 출범하게 됐다. 공화당 의원들은 대부분 이 위원회 설치 특별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수사권과 관련해선 미국 헌법과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executive privilege)’ 논리가 문제가 됐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나눈 극비 대화가 공개되는 선례를 남기면 향후 대통령직 수행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이다. 민주당과 위원회 측도 이를 감안해 입법 과정과 위원회 운영 과정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소환과 강제 자료 수집 권한을 집행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럼, 수사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다. 강제적으로 정부 관리를 소환하거나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었다면 어떤 정부 부처도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권 집행도 중요하지만 수사권이 가지는 심리적인 압박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례로 연방항공청(FAA)과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는 테러 당시 대처상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일지 등을 일부만 제출했다가 이런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관련자 소환과 모든 자료 압수로 이어졌다. 또 이를 계기로 위원회가 정부 부처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다는 여론이 생기자 백악관도 미국 역사상 한 번도 외부에 넘기지 않았던 ‘대통령 일일보고(PDB)’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부시·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방문 조사도 수사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뒤엔 공화당 위원을 포함한 모든 위원이 수사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다고 공감했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공화당)이 임명한 토머스 킨(전 뉴저지 주지사) 위원장과 민주당이 추천한 리 해밀턴(전 하원의원) 부위원장 모두 위원회 출범 때부터 9·11 테러에 대한 책임을 정부 관리 개개인에게 묻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위원회 운영이 정치적으로 희화화되지 않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데 유족 등은 이에 대해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법무부가 위원회에 위증을 한 관리들은 징계 조치를 취했다. 또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처벌을 받았다.”

-위원회의 젤리코 사무총장은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친구였는데 어떻게 사무총장이 됐나.
“젤리코는 라이스뿐 아니라 부시 행정부에 지인이 많았고, 부시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맡기를 원했기 때문에 위원회 활동 내내 끊임없이 ‘방해공작’을 폈다. 본인은 방해가 아니라 신중한 판단이었다고 해명하지만 위원회의 어느 누구도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부시 정부 인수위에서도 활동했는데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은 위원회가 한참 진행된 뒤였기 때문에 유족의 해임 요구도 먹혀들지 않았다. 수사권뿐 아니라 위원회 구성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필립 시넌 20년 넘게 뉴욕타임스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워싱턴DC에 상주하면서 국방부·법무부·국무부를 출입했다. 순회특파원 시절엔 전장(戰場)을 비롯한 세계 60여 개국에서 기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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