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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 27%인데 홀로 배불려 … '표적' 된 오나시스 후예들

중앙일보 2014.07.26 01:50 종합 18면 지면보기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왼쪽)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 결혼한 이듬해인 1969년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촬영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그리스 아테네 교외에서 대낮의 납치극이 벌어졌다. 복면을 쓴 4명의 납치범이 나눠 탄 두 대의 밴이 차량 한 대를 앞뒤로 에워싸고 쫓았다. 미행을 눈치챈 피해자가 뒤따르던 밴과 일부러 충돌해 탈출하면서 납치는 미수로 끝났다. 실패한 납치극인데도 그리스 언론은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피해자가 안드레아-로아니스 마르티노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 선박 재벌 안드레아 마르티노스의 아들이다. 이들 가족이 경영하는 ‘미네르바 마린스’는 그리스의 10대 해운사다. 지난달 독일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또 다른 선박 재벌은 납치돼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서 풀려날 수 있었다. 요즘 그리스에서 선박 재벌은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는 외출할 수 없다. 극좌파 단체로부터 수시로 위협당하는 데다 납치 같은 실제 공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 '공공의 적' 선박 재벌
성장 주역서 탐욕의 상징으로 전락
납치극 잇따라 외출 마음놓고 못해



 선박 재벌을 노린 범죄는 이들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됐다는 게 슈피겔의 보도다. 현재 그리스에서 선박 재벌은 탐욕과 부도덕의 상징이다. 설문조사에서는 정치인과 비호감 1위를 겨룬다.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 등 그리스의 선박왕들은 바다를 누비며 경제를 이끌었다. 이들의 화려한 생활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선박왕의 후예들은 어쩌다 국민의 ‘공공의 적’이 됐을까.



 올해 그리스 해운산업은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세계 해운시장이 호황이던 2000년대 초의 나 홀로 부진에서 벗어나 2010년부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유조선·벌크선·컨테이너선 등 보유 선박이 4894척. 재화중량톤수(DWT: 선체 및 설비, 항해에 필요한 연료 등 장비를 제외한 적재화물 중량) 2억9173만 5318t으로 전 세계 수송량의 16.3%를 차지한다. 선박의 가치도 1010억 달러(약 103조 6000억원)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관광업과 함께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해운업의 호황은 경제가 파탄난 그리스 국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여론은 정반대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가운데 선박 재벌만 각종 특혜로 배를 불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혜는 바로 세금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의 선박 재벌들은 수십 가지에 이르는 특별법에 따라 면세·절세 혜택을 받고 있다.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오른쪽)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샬럿 포드. 헨리 포드 2세의 딸이다. [중앙포토]
대표적인 것이 톤(t)세 제도다. 톤세 제도는 해운사들이 영업이익이 아닌 선박의 톤수를 기준으로 법인세를 산출하도록 하는 일종의 특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해운업 경쟁력을 위해 시행 중이고, 우리나라도 올해 말을 일몰 시한으로 정해 2005년부터 시행 중이다. 적용 세율은 국가마다 다른데, 그리스는 해운 전문가들이 “이만큼 선주가 재정 부담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고 할 정도다.



 선박을 매각할 때도 세금이 없고,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에 대해서도 역시 과세하지 않는다. 이런 제도를 악용해 선박 재벌들은 선박을 해외에 등록했다. 전 세계 선박의 약 15%는 그리스인이 소유하고 있지만, 이 중 3분의 1만 그리스 국기를 달고 운항 중이다. 몰타 등 조세회피지역에 등록된 나머지 선박이 올리는 수입은 고스란히 선주들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슈피겔은 그리스 선박 재벌들이 2002년 이후 절세한 금액이 1400억 유로(약 194조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스위스로 흘러들었다. 스위스 은행의 그리스인 소유 비밀계좌 명단인 이른바 ‘라가르드 리스트’에 포함된 2000여 명 중 100명 이상은 선주와 그들의 아내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위스에 있는 약 600억 유로(약 83조원) 규모의 그리스 자금 대부분은 선박 재벌이 빼돌린 재산으로 추정된다.



 50년 이상 큰 논란 없이 이어져 온 특혜는 경제 위기와 함께 문제로 떠올랐다. 온 국민이 고통을 분담하고 있는데, 특혜를 밑천 삼아 호화생활을 하는 선박 재벌들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일자리를 잃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일 때, 젊은 상속자들은 화려한 파티를 벌여 여론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국민들은 “그리스는 부자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가 됐다”며 분노했다.



 더구나 해운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가족경영 체제로 운영되는 해운사들은 대규모 투자로 더 큰 수익을 꾀하고 있다. 지난해 그리스는 275척의 선박을 새로 발주했고, 올 초에도 19척을 주문했다. 전 세계 중고 선박의 99%도 그리스가 사들였다. 지난해 선박 구입과 개조에 지출한 비용이 각각 100억 유로(약 13조8000억원), 올해도 50억 유로 이상을 지출했다. “어려울 때 투자하는 게 우리의 성공 비결”이라는 선박 재벌들의 주장에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회피한 세금과 빼돌린 자금으로 더 큰 부를 쌓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박 재벌들은 “사람들이 질투하고 부러워한다”며 화를 키우고 있다.



 결국 지난해 그리스 정부는 선주협회와 협상에 들어갔다. 더 이상은 여론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441개 해운사가 자발적인 추가 납세에 합의했다. 향후 3년간 2배 높은 톤세 세율을 적용해 세금을 납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이에 따라 매년 약 1억4000만 유로(약 1439억원)의 세수 증대를 기대하고 있다.



 등 떠밀려 세금을 내게 된 선박 재벌들은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도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세금을 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2012년 선주들이 ‘개인’ 자격으로 납부한 세금은 1500만 유로. 그들이 고용한 선원들은 5500만 유로를 납세했다. 선박 재벌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거세지는 이유다.



 지난해 말 그리스 정부는 이들에 대한 세금 혜택은 끝났다며 해외에 등록된 그리스 선박에도 과세할 수 있도록 법 제정에 나섰다. 여론 때문만은 아니다. 여전히 실업률은 27%를 넘고 국가부채도 GDP 대비 160%에 이르는 등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산업 중 거의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는 해운업 말고는 정부가 기댈 곳이 없다.



 약 800개의 가문이 가입한 그리스 선주협회는 반발한다. “2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의 6% 이상을 책임지는 해운업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 국기를 단 선박을 아예 못 보게 될 것”이라며 정부를 협박하기도 한다.



 그리스 언론에 따르면 현재까지는 정부가 선박 재벌들에게 끌려가는 모양새다. ‘자발적 납세’에 합의한 지 1년이 됐지만 아직 한 푼의 세금도 납부되지 않았다. 언론들은 선박 재벌들이 “국가에 부스러기나 던져주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부 역시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며 비판을 받고 있다. “긴축안에 반대하며 ‘세금을 더 낼 수 없다’는 시민에겐 의무를 강조하면서 부와 특혜를 누리며 ‘세금을 더 낼 수 없다’는 선박 재벌들에겐 속수무책”이라는 지적이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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