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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나 떠나련다, 내 첫 마음의 흔적 찾아서

중앙일보 2014.07.26 01:43 종합 22면 지면보기
효율적인 여행법을 안내하는 책은 많다. 하지만, 지혜로운 여행자가 되는 방법은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사진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로버트 고든 지음, 유지연 옮김

펜타그램, 344쪽, 1만6000원



그리스의 끝 마니

패트릭 리 퍼머 지음, 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516쪽, 2만원



헤세의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479쪽, 1만8000원




멋진 사진으로도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소중한 장소를 발견하면, ‘이곳을 꼭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곳에 덜 찾아가는 것이 그곳을 무사히 보존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명품이 경제적 풍요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해외여행이 문화적 풍요의 상징으로 자리잡아버렸다. 하지만 여행자의 인식은 해외여행자 연간 1400만 명 시대라는 초유의 상황에 비하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여행은 아직도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행위다. 보다 장소친화적인 여행, ‘나’보다는 ‘그곳’을 지켜주고 배려하는 여행이 절실한 요즘이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여행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쉽게 검색할 수 있지만, ‘지혜로운 여행자가 되는 방법’은 스스로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는 인류학의 연구방법인 철저한 ‘현지조사’와 ‘참여관찰’을 여행에 적극 활용하여 여행의 품격은 물론 장소의 품격을 존중하는 길을 알려준다. 상품화된 패키지여행을 넘어 반드시 현지에 가서 직접 발로 뛰어야만 알 수 있는 문화의 속살과 접촉하는 길. 그것은 일시적인 쾌락을 소비하는 여행이 아닌 현지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몸짓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물건의 가격을 흥정하면서 단지 가격을 깎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가치관과 접촉하는 것이며, 입에 맞지 않는 현지음식을 꾹 참고 먹으면서 그들의 음식문화에 스며든 생생한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해외여행에서의 배변 문제라든지 여행자 특히 여성 여행자를 위한 안전 대비책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모험과 쾌락 뒤에 존재하는 불평등, 신제국주의로서의 해외여행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더 나은 여행문화를 성찰하는 거울이 되어준다.



 『그리스의 끝 마니』 는 여행이란 아름다운 장소를 향한 미학적 갈망에서 시작된다는 나의 통념을 깨뜨려주었다. 마니는 결코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디아스포라의 상처로 얼룩지고 멍든 공간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쓸쓸하고 황량해 보이는 그리스 남부 펠레폰네소스 지방의 마니는 상처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희망의 속살만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장소가 품어온 수많은 영혼의 상처들로 인해 비로소 아름다워진 곳인 셈이다. 저자는 “여행이란 삶이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열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삶이 산산이 해체되어 조각나고, 다시 처음부터 인생을 설계하고 미래의 주춧돌을 깔아 ‘나’를 새로이 건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선물하는 가슴 저린 통과의례의 과정이다.



1933년 18세 되던 해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저자의 도보여행은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그리스까지 이어졌고, 이 용감한 무전여행자는 농가의 헛간에서부터 귀족의 손님용 침실에 이르기까지 온갖 낯선 장소들을 자신만의 공짜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버린다.



 『헤세의 여행』은 평생 수많은 여행을 통해 창작의 영감을 얻어온 헤르만 헤세의 기행문 모음집이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을 탐욕스레 폭식하는 여행이 아니라 가닿는 장소의 굴곡마다 깊숙이 숨어 있는 자신의 오랜 그리움과 만난다. 헤세 여행의 키워드는 가장 자기다운 장소를 향한 노스탤지어다. “나는 7월의 따뜻한 어느 날 저녁 시간에 태어났다. 나는 그 시간의 온도를 알게 모르게 평생 좋아하며 찾아다녔다. 그 온도가 아니면 나는 고통스런 마음으로 아쉬워했다.” 24세부터 50세까지 끊임없이 여행했던 그의 여행 루트는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론 말레이시아·스리랑카·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고 있다.



 내 오랜 여행의 유일한 비결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것이다. 그렇게 도보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가기로 계획하지 않았던 장소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는 때가 있다. 왜 하필 이 장소, 이 물건, 이 사람, 이 향기에 매혹되는 것일까. 내 무의식의 안테나와 어떤 장소의 안테나가 뜻밖의 교신을 시작하는 순간. 그 매혹, 그 이끌림, 그 해부 불가능한 설렘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때가 바로 나만의 내밀한 마음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여행은 걷기의 단순하고 명쾌한 행복을 되찾게 만든다. 나는 오늘도 꿈꾼다. 소비하고, 폭음하고, 탕진하는 여행이 아니라, 낯선 거리를 천천히 거닐고,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디선가 잃어버린 내 싱그러운 첫마음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마음의 여행을.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문학평론가.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마음의 서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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