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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 <19>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팔공산 갓바위 돌부처의 비밀

중앙일보 2014.07.26 01:27 종합 23면 지면보기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조선 숙종 연간의 학자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경상도 영천의 큰 절 은해사(銀海寺) 말사(末寺)를 따라 팔공산 일대를 등산하던 중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높은 산정의 커다란 바위에 돌 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북쪽 벽으로 벼랑을 타고 나가 또 바위틈 사이로 갔다. 그 가장 높은 곳에 2층 누각이 있었다. 올라가 층루에 앉아보니 커다란 바위에다가 돌 불상을 새겨 놓았는데 자못 기이하고 교묘하였다. (…) 남쪽으로 동래와 울산을 바라보니 좌우로 300여 리가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진실로 반평생에 처음 보는 기이한 풍경이었다.(緣崖北壁, 又行巖隙間. 最高處有二層樓, 上坐層樓, 則因大巖刻石佛像, 頗奇巧. (…) 南望東萊蔚山, 左右數三百餘里, 皆入望中, 眞半生奇觀也)”(『산중일기(山中日記)』, 심경호 옮김)



 정시한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돼 천여 년을 호젓이 산속에서 좌정해온 석불을 본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석불이 바로 오늘날 한국불교 최고의 기도처로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의 이른바 ‘갓바위 부처님’이다. 갓바위 석불은 다시 19세기 무렵 사지(寺誌)나 읍지(邑誌) 등에 등장하여 점차 알려진 후 1965년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 석불은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는 속설과 함께 일 년에 수백만 명이 참배하는 성물로 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아왔다. 인근 가톨릭 교구의 한 신부는 이 석불을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갓바위 석불은 요즘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는 속설은 정말 도움이 절실한 힘없는 민초들의 입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석불이 광범한 신앙의 대상이 된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팔공산은 신라 때 중악(中岳)이라 하여 토착신앙의 근거지였다. 나중에 불교가 전래돼 그 자리에 절과 석불이 들어선 것이다. 이 과정은 배타적이지 않고 조화로웠다. 『삼국유사』를 보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 심지(心地) 화상이 동화사(桐華寺)를 창건할 때 팔공산의 산신이 나와 함께 협력하여 길지(吉地)를 찾아 절을 짓는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오늘날까지 절에 남아있는 산신각, 칠성각 등의 전각과 공양간에서 조왕신을 모시는 일 등은 불교와 토착신앙이 사이좋게 공존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갓바위 석불이 높은 대중성을 얻은 보다 깊은 이유는 바로 이 포용성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만 기도객의 귀의처라는 사실에 비하여 산 정상에 있는 석불로 가는 길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길게 이어진 가파른 계단 길을 남녀노소, 심지어 노약자도 힘겹게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길옆과 사찰 경내에는 화려한 상가나 건물도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이름 있는 사찰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간소하다.



 이처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한국불교 예술의 특징이기도 한데 바로 여기에서 갓바위 기도객들의 신심(信心)이 더욱 우러나오는 듯하다. 최근 갓바위 인근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자던 논의가 무산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편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된 개발 논리가 제발 이곳에서는 펼쳐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천년 석불 ‘갓바위 부처님’의 신화와 숭엄한 아우라를 지켜내는 길일 것이다.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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