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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따라 엇갈리는 퍼블리시티권 침해 소송

중앙일보 2014.07.26 00:17 종합 9면 지면보기
민효린(左), 유이(右)
“재산권으로서의 퍼블리시티권은 성문법과 관습법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또 (연예인 이름 등에 대한) 키워드 검색으로 경제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볼 수도 없다. 원고들의 청구 모두 이유 없으므로 기각한다.”


'민효린 인형코' 인정, ‘유이 꿀벅지’ 불인정 …이름값 판결 오락가락

 24일 오전 10시 서울서부지법 제405호 법정. 재판장인 민사14부 이종언 부장판사는 이같이 판결했다. 배우 김남길·배용준 등 58명이 ‘네이트’를 운영 중인 SK커뮤니케이션즈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이 원고패소로 결론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포털사이트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검색하면 ‘김남길 안경’ 등 상품 판매 촉진 키워드도 함께 검색되자 “당사자 허락 없이 이름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냈었다.



 이에 앞서 지난 1일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여주인공 김선아(39·여)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도용한 성형외과 원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겼다. 25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서울중앙지법은 “‘퍼블리시티권’은 독립된 재산권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서부지법의 판결과 정반대였다.



 이름값에 대한 권리인 퍼블리시티권은 특정인의 사진·이름 등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배타적 재산권이다. 보통 유명인의 이름·사진 등을 ▶당사자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그로 인해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을 때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한 것으로 본다.



 ‘이름값’을 두고 맞붙은 소송전의 결과가 재판부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판결이 선고된 퍼블리시티권 소송을 분석했더니 총 32건 중 17건에서 퍼블리시티권을 보호 대상으로 인정했다. 절반이 조금 넘는 수치였다.



 배우 민효린(28·여)은 지난해 7월 한 성형외과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코 수술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에 자신의 사진과 함께 ‘민효린의 인형 같은 코는 타고나야만 하는 걸까요? OO성형외과에선 연예인 부럽지 않은 명품 코를 만들어 드립니다’라는 홍보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성형외과 원장에게 2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미 상당수 하급심 판결에서 퍼블리시티권 개념을 인정했고 그에 터 잡은 법률관계가 형성돼 왔기 때문에 법관에 의한 법 형성 과정을 통해 우리 법질서에 편입됐다”고 봤다. 하지만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도 32건 중 15건이나 된다.



왼쪽부터 백지영, 김선아, 신은경.
 2011년 8월 서울 서초동의 한 피부숍은 홍보를 위해 블로그에 가수 유이(26·여)를 이용하기로 했다. 유이의 허벅지가 드러난 사진 3장과 함께 ‘유이처럼 꿀벅지 만들기’ 등의 글을 게재했다. 유이 측은 “퍼블리시티권이 침해됐다”며 2000만원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무법인 에스엔의 구주와(34) 변호사는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법률 자체가 없고 대법원에서도 퍼블리시티권에 대해 확정된 판례가 아직 없다”며 “하급심이 각자 판단에 따라서 결론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법 체계와 현실 간의 괴리, 이를 메워 줄 가이드라인의 부재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거였다. 법 제정이 시급한 이유다.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지 않은 한 재판부도 판결문에 “최근 연예·스포츠 산업의 발전으로 유명인의 초상 등을 광고에 이용하면서 분쟁이 잦아지고 있다. 이를 해결할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적었다.



 가이드라인이 없다 보니 퍼블리시티권이 인정돼도 손해액 산정 방식은 제각각이다. 영화배우 신은경은 지난해 8월 자신의 이름이 14일간 웹사이트에 도용된 데 대해 20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산정 기준은 그가 한 기업과 홈쇼핑 방송에 월 4회씩 1년간 출연 대가로 계약금 1억원에 매출 3%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한 계약이었다. 가수 백지영은 비키니 입은 사진을 2년 넘게 도용당했다. 성형외과 원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손해배상금 400만원을 인정받았다. 2009년 한 주식회사와 광고모델 계약을 맺으면서 1년 동안 TV 광고 1회, 인쇄 광고 4회, 이벤트 및 행사 2회 진행을 조건으로 2억3000만원을 받은 게 산정 근거였다.





 퍼블리시티권 침해를 인정받고도 배상받지 못한 경우도 10건(권리 인정 판결 17건 중)이나 됐다. 걸그룹 원더걸스는 지난해 1월 서울 신사동의 한 성형외과 원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해당 원장이 ‘원더걸스 소희 단발머리 작은 얼굴성형 메이크업 정보와 얼굴 작아지는 법’ 등의 글을 사진과 함께 병원 블로그에 올린 걸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퍼블리시티권 침해는 인정했다. 그러나 “원고들의 재산상 손해액을 확정하기 어렵다”며 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명인의 사진 등을 함부로 도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 연예인들은 소송을 낼 때 정신적 피해에 따른 위자료도 함께 청구한다.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은 초상권과 성명권을 함부로 도용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한다. 지난해 판결 32건 중 위자료도 청구한 건 29건이고 이 중 21건에 대해서는 위자료 지급 판결이 내려졌다. 인정 액수는 수백만원~2000만원대였다.



 국내에서 퍼블리시티권의 법적 논쟁이 시작된 건 1990년대 중반이다.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55년 사망)의 고종사촌인 마커스 디 윈슬로 주니어가 1세대 개그맨 사업가 주병진(55)씨 회사 ‘좋은사람들’의 속옷 판매회사에 대해 소송을 내면서였다. 이 속옷에는 ‘JAMES DEAN’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첫 판결은 97년 나왔다. 재판부는 “퍼블리시티권은 우리나라의 성문법상 권리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미국은 퍼블리시티권을 폭넓게 인정한다. 53년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의 초상권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두고 두 껌 제조회사가 소송전을 벌이면서 ‘퍼블리시티권’이 처음 명명됐다. 현재 30여 개 주에서 인정된다. 독일은 판례를 통해 보호한다. 일본은 하급심에 따라 판결을 달리해오다가 2012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처음으로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했다.



 법무법인 수호의 손광남(36)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입법을 통해 퍼블리시티권의 보호 범위와 권리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혼란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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