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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국가상비군·KB바둑리그 … 팀플레이 눈뜬 한국 바둑

중앙일보 2014.07.24 00:56 종합 23면 지면보기
지난 6일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 경기장에서 열린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서울 예선에서 어린이들이 경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 장면 1

공정성 확보 스포츠 속성 강화
전국체전 시범종목 인기 예약
시니어 바둑 클래식도 첫선
제도 정비로 도약의 힘 모아



 “억울하다. ‘열!’ 소리 이전에 돌을 놓았다.” 지난 5월 25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 계시원의 “열!” 소리와 함께 홍민표(30) 8단이 반칙패를 당했다. 초읽기 제한을 어긴 것이다. 홍 8단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김수장(57·9단) 심판위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KB바둑리그는 “계시원의 초읽기 속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시간은 엄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 장면 2



 “세상이 변했으니 우리도 대국을 9시로 당깁시다.” 1991년 9월 서울 관철동 한국기원 4층 가을 기사총회장. 강철민(1939~2002) 9단이 느린 저음으로 오전 10시 대국을 9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순간 모든 기사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강 9단은 멋쩍게 다시 앉았고 안건은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시간은 여유롭게 주어졌다.



 상반된 풍경이다. 2014년 오늘 장면2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전의 바둑계는 시간에 관대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바둑이 변하고 있다. 3월 13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는 바둑 변천의 시대적 맥락을 확인하면서 한국 바둑의 3대 추진 과제를 발표했다. 아마바둑 인구의 저변 확대, 중국·일본 프로바둑에 대한 경쟁력 강화, 대표기구로서 한국기원의 역할 확충이다.



 2014년 상반기 한국 바둑계 주요 변화 ‘톱6’를 뽑아봤다.



① 국가상비군 창설=5월 7일 국가 상비군이 발대식을 했다. 30명의 정예를 모아 단체 연구를 제도화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한·중·일의 대국 자료는 개인이 소화하기 힘들 정도다. 공동 연구만이 정보를 따라갈 수 있다. 상비군은 월~금 하루 7시간씩 모여 실전연습과 연구를 거듭한다.



 성과가 없지 않다. 6월 9일 19회 LG배 16강전에선 한국과 중국이 서로 네 판씩 승리해 4대4 호각을 이뤘다. 2013년 맹렬했던 중국세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메지온배 한·중 신예대항전(6월 17~18일)에선 한국이 2대1로 이겼다. 이제 공동 연구는 바둑계의 새로운 문화다.



② KB바둑리그 정비=국내 최대 기전인 바둑리그가 내실을 다졌다. 무엇보다 감독의 권한이 높아졌다. 감독은 팀원 8명을 선발전 없이 선발할 권리를 갖고 있다. 이제 기사들은 팀의 지시와 훈련에 따라야 한다. 1주일에 두 번은 모여 연구하는 풍토가 정착되고 있다.



 오랫동안 바둑은 개인 중심이었다. 잡초바둑으로 불리던 서봉수(61) 9단은 “오직 나 스스로와의 싸움만이 있을 뿐”이라고 기사의 자세를 압축했다. 전통에 기대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 기사는 홀로 일어서야 했다.



 변화가 왔다. 80년대 중반 한·중·일 1인자의 수준이 비슷해졌다. 실력을 가리자고 88년 후지쓰배, 89년 응씨배 세계대회가 열렸다. 조훈현(61) 9단이 상금 40만 달러의 제1회 응씨배를 우승한 후 경쟁은 심화됐다. 기사들의 활동무대가 세계로 넓어졌다. 2014년 예정된 세계대회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해 20여 개에 이른다.



 세계대회가 많아지면서 국내 환경도 변했다. 국제적 경쟁 없는 산업이 취약해지듯 바둑도 그렇다. 나라 간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면 국내의 바둑문화가 축소된다. 가치 낮은 재화로 평가 받아 인기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가 간 충돌 과정에서 국내 바둑을 지켜내고자 할 때 단체의 강조는 필연적이다.



 ③ 스포츠 속성 강화=한국기원은 대국의 공정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성룡(38·9단) 국가상비군 전력분석관은 “대국 내규(內規)를 정비해야만 바둑의 정체성은 물론 기사들의 자세도 단단해진다”고 말했다.



 한국기원은 ‘경기규칙 제2조 계시기(計時器) 사용’ 문제를 기사들과 논의하고 있다. 현재는 “화장실에 갈 경우 착수 후 계시기를 일시 정지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조만간 “화장실 사용 등 개인적 사유로는 계시기를 자유롭게 정지시킬 수 없다”는 방향으로 바뀔 전망이다. 계시기도 기사가 직접 누르도록 조정할 방침이다. 계시기를 정지하면 시간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화장실에 간 기사는 시간을 자유로 쓸 수 있고 상대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바둑의 스포츠 속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다. 국제대회의 제한시간은 대부분 1~3시간으로 짧다. 짧은 제한시간은 바둑의 스포츠 측면을 강조하게 했다. 한국은 국내의 제한시간을 줄여서 세계대회에 적응했다. 일본의 주요 기전 제한시간은 8시간에 멈췄다. 일본 바둑이 무너진 이유의 하나다.



④ 전국체전 시범종목 선정=4월 1일 대한체육회 제9차 이사회에서 바둑은 제95회 전국체전의 시범종목으로 확정됐다. 제84회 전국체전 전시종목 참여 이후 11년 만의 승격이다. 가을엔 소년체전 정식종목 확정이 기대된다.



 이번 선정은 바둑의 저변을 더욱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전국적으로 1년에 200여 개 넘게 열리는 아마바둑 대회만 보더라도 바둑의 잠재력은 탄탄하다. 이광구(58) 바둑평론가는 “젊은 층이 바둑을 두지 않고, 또 한국 바둑이 위기라고 하지만 아마의 저변은 90년대보다 오히려 넓다”고 설명했다.



 어린이들의 잠재력도 충분하다.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년째 매회 참여 인원은 1만 명을 넘는다. 올해는 온라인과 함께 지역예선(5월 16일~7월 20일)을 치른 후 다음달 7일 본선을 남겨놓고 있다.



 박치문(66) 한국기원 부총재는 “바둑이 소년체전은 물론 전국체전의 정식종목이 되기에 충분한 증거”라며 “인터넷 게임 중독에 빠지는 청소년들이 안타깝다. 정서와 논리를 함양할 수 있는 바둑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⑤ 내실 다진 한국기원=한국기원의 틀이 단단해졌다. 한국기원은 정책 입안과 실천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사·기원 행정부·기사들이 모인 운영위원회가 비정기적으로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이전의 상임이사회격인 운영위원회는 연간 6회 이상 열릴 예정이다.



 7월 5일 홍석현 총재의 국제바둑연맹(IGF) 신임 회장 취임도 국내 바둑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적인 협력 없이는 국내 기사의 대외 활동도 한계가 있다.



⑥ 시니어들의 활약 확대=모든 조직은 활력이 필요하다. 상비군과 바둑리그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젊은 기사들의 무대다. 올해부터 시니어(만 50세 이상) 기사들의 ‘시니어 바둑 클래식’ 대회가 매 홀수 달 ‘시니어 왕위전’ ‘시니어 국수전’ 등의 이름을 걸고 다섯 번 열린다. 그리고 최종 홀수 달엔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린다. 김종열(49) 한국기원 전략기획실장은 “시니어 기사들의 바둑계 참여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50대 이상의 애기가들에게도 특별한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문용직 객원기자



◆초읽기=착점 시간이 10초 남았을 때 남은 10초를 하나하나 세어 알려주는 행위. “하나, 둘, 셋, …, 아홉, 열!” 이라 불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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