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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그래도 곳간은 지켜야 한다

중앙일보 2014.07.24 00:10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사흘 전 2기 내각 첫 국무회의를 가졌다. 비장한 당부와 다짐이 많았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로 막 발동을 걸려던 개혁·혁신 과제들이 올 스톱된 지 석 달여, 갖은 곡절과 우여 끝에 출범한 2기 팀이니 오죽했으랴. 주로 경제 쪽에서 “마지막 기회” “절박한 각오” 같은 격한 표현이 꽤 나왔다고 한다. 그중 내 목에 딱 걸린 건 “금융·재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 대목이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을까.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방법은 의문이다. 정말 지금 경제가 그렇게 나빠 극약 처방까지 해야 하는 상황인가.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어제 당정협의에서 “단기 재정 건전성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 경제 상황을 아주 절박하다고 봤다. “지금 경제를 못 살리면 자칫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10여 년 전 당시 여당 실세 A의원과의 논쟁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맨날 경제가 위험해진다, 죽는다, 그러는데 진짜 죽는 거 한 번도 못 봤다. 도대체 어떤 게 죽는 거냐? 왜 언론과 관료들은 위기감을 매번 그렇게 부추기나.” 그러면서 그는 나라 곳간 타령이나 하며 돈줄을 움켜쥔 공무원들 때문에 쓸 돈을 못 써 표 떨어지고 정권 뺏긴다며 관료들을 탓했다. 그러니 경제 사령탑은 관료가 아니라 정치인이 맡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치인의 말은 가려 듣게 됐다. 속내를 한 번 더 의심해 보는 습관도 생겼다. 그래서 경제 관료로 시작했지만, 중간에 뜻을 바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새 경제부총리가 2기 경제팀장으로 내정됐을 때부터 사실은 걱정이었다. 경제를 살린다며 군불·센 불 가릴 것 없이 다 때려는 건 아닐까. 그래서 후대엔 냉골을 데울 잔가지는커녕 구들장마저 안 남아나는 건 아닐까.



 의심은 꼬리를 무는 법, 대통령은 어떤가. “재정·금융을 다 동원하라”고 말한 그 박 대통령이 지난해 내가 봐왔던 박 대통령이 맞나. 지난해의 그는 “증세는 안 된다”는 증세 불가론자였다. 복지를 위해 증세해야 한다는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집요한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세금을 더 걷기보다는 있는 돈을 아끼고 맞춰서 복지에 써야 한다고 버텼다. 나는 그때 박 대통령의 경제 소신이 재정 건전성, 나라 곳간을 지키는 데 있는 줄 알았다. ‘5년 단임 대통령이지만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나라의 경제 체력(펀더멘털)부터 걱정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경제관을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재정도 쓸 땐 써야 한다. 김대중처럼 펑펑 쓰고 칭찬받은 대통령도 있다. DJ가 외환위기를 1년 반 만에 극복한 힘이 바로 튼튼한 재정이었다. 구조조정에 150조원 넘게 쏟아부었지만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0%를 넘지 않았다. 그게 누구 덕인가. A의원이 탓한 그 관료들이 나라 곳간을 제 곳간 지키듯 한 덕 아닌가.



 반면 노무현·이명박 두 대통령은 균형 재정은 말로만 외치고, 실제로는 혁신·기업도시며 4대강에 돈을 퍼부었다. 나라 곳간 축낸다는 비판이 커지자 MB는 4대강 사업에 수자원공사를 끌어들이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2기 경제팀이 기금·금융을 동원하겠다는 게 이런 편법과 뭐가 다른가. 재정을 이왕 쓰겠다면 국민 동의와 국회 합의를 통해 당당히 써야 한다. 나라 곳간이란 게 어느 한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잖은가.



 진단과 처방이 정확했는지도 의문이다. 감기냐 폐암이냐부터 제대로 따져야 한다. 한 전직 장관은 “우리는 일본과 다르다. 무엇보다 재정이 튼튼하다. 큰 무리 안 해도 3%대 성장한다. 재정 거덜나고 20년간 평균 0%대 성장한 일본이 하는 극약 처방을 우리가 왜 지금 따라 하나. 규제 완화, 구조개혁만 제대로 하면 된다. 세계 경제가 조금씩이지만 살아나고 있다. 재정만 튼튼히 지켜놓으면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 명의는 독한 약을 쓰지 않는다. 병을 잡는 것보다 환자 잡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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